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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gun Jung Mar 25. 2019

지하철 화장실 휴지와 넷플릭스

쉬운 편안함, 멋진 신세계

휴지

길이 막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외할아버지 손을 잡고 지하철을 자주 탔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렸던 나의 최대 관심 항목은 지하철 노선도 암기, 그리고 화장실 앞에 놓인 일회용품 자판기였다. 거기서 폴로 사탕을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도 떠오르고, 집에서 너무 편하게 썼었기에 당연히 공짜인 줄로만 알았던 휴지 몇 장이 슈퍼에서 사 먹던 과자 한 봉지 가격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일까지. 아무튼 비싼 휴지와 별개로, 6호선을 타고 날 세상에서 가장 아껴주던 분을 따라 서울을 여행하던 시절은 흐릿하고 까마득하지만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린 마음에 저 콘돔이 무엇인지 참 궁금했었고, 결국 성교육 시간 전에 알게 됐다. 출처: http://bit.ly/2HS3Dpu


나이를 좀 먹고 나서의 휴지에 관한 기억은 자물쇠가 잠겨있는 거치함이다. 예전같이 휴지를 돈 주고 구매해야 할 필요는 없어졌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중요도 있는 물품으로 여겨져 어뷰징은 통제되었다. 가치를 규정한 것은 사용자와 공급자 모두다. 인생이 팍팍한 사용자 누군가는 종종 개방된 화장실을 찾아 살림에 보탬이 될 거리를 찾았고, 이 것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없었던 관리자들은 잠금장치를 달았다. 기술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져 단가가 하락하였고, 사회 또한 전체적으로 부유해져 휴지를 비교적 자유롭게 비치해두는 비용을 감내할 수 있었지만, 개인도 사회도, 물질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아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준공공재가 담겨있는 열리지 않는 거치함은 아직 쿨할 수는 없는 그 어떤 감정의 벽을 상징했다.


우리 집 앞 지하철역 화장실에 어느 순간부터 휴지 자물쇠가 자취를 감췄다. 지하철뿐만 아니라 어느 공공시설을 가도 대부분 그렇다. 급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보이는 아무 건물이나 들어갔을 때 도어록이 종종 가로막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무사히 입장하면 휴지가 문제였던 적은 별로 없다. 그나마 문제가 생겼던 경우라면 관리되지 않은 곳이라 덩그러니 갈색 휴지심만 놓여있는 경우. 마무리 도중에 희망이 사라진 사람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무튼 최근에는 잠겨있는 거치함을 본 기억이 떠오르지도 않고, 거치함을 굳이 누군가 열어 휴지를 훔쳐가 비어있던 일 때문에 곤란을 겪었던 기억도 없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 내 인식은 공공장소에도 휴지는 당연히 구비되어 있는 공기 같은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고,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물론 이 현상이 내가 주로 거주하는 장소가 서울에서도 경제적으로 풍족한 축에 속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 한정해서라도 내가 목격한 상황의 변화는 객관적이다.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 가난한 시골 사람이었던 아버지는 형편이 넉넉지 않아 신문지로 휴지를 대체해야 하셨다고 한다. 이제는  쓰라림 느낄 필요 없는 부드러운 엠보싱 휴지와, 이런 자극마저도 잊고 살게 만드는 비데가 웬만한 곳에 다 설치돼있는 세상이다. 오죽하면 우리 세대엔 비데가 없으면 볼 일을 못 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들도 바지 버리는 일 없이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정말 세상이 편해지고 좋아졌다.

요즘은 군대 화장실에도 비데가 있다. 출처: http://bit.ly/2Yi4kOF


좋아진 세상에서 휴지의 품질은 높아졌고, 가격은 점차 떨어졌으며, 저렴한 고품질의 휴지에 대한 모두의 구매력도 커졌다. 이제는 그깟 휴지를 훔치려는 사람도 적어졌고, 설령 극소수의 훔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정도 손실은 관리자 또한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내가 사는 세상은 휴지의 영역에서만큼은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을 모두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엔 아직 분배의 문제가 크게 남아있을지언정, 이런 사소한 것들에 관해서만큼은 부유해졌고, 관대해졌다.


넷플릭스

화장실에서 넷플릭스를 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휴지 영역도 발전했지만, 디지털 환경은 이 발전 속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근 수십 년간 컴퓨터 하드웨어만큼 빠르게 성능은 높아지고 단가는 낮아진 영역이 있을까? 네트워크와 하드웨어의 발전 덕분에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가 탄생했고, 오래 앉아있으면 건강에는 안 좋겠지만 내 배변 시간은 즐거워졌다. 핸드폰 이외의 별도 기기를 구매할 필요 없이 슈츠를 고화질로 볼 수 있다고? 매달 가벼운 식사 한 두 끼 가격만 내면 내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알아서 추천해주고, 그걸 다운로드할 필요도, 인코딩할 필요도, 자막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힘겹게 싱크를 맞출 필요도 없이 즐기게 해 준다고? 이런 방식의 미디어 공급을 불과 10년 전에 예상할 수 있었을까? 설명해준다고 이해조차 할 수 있었을까?

더 유명한 넷플릭스로 제목을 잡았지만 난 사실 왓챠플레이가 더 좋다. 출처: http://bit.ly/2YeBz5c


이건 휴지 따위를 한참 뛰어넘는 혁명이고 마법이다. 40년 전 학생이었던 아버지에게 "정요한 씨, 당신 아드님 세대에는 공공장소 화장실에 가면 휴지를 공짜로 쓸 수 있어요. 변기는 대부분 수세식이라 앉아서 편안하게 똥을 누게 된답니다. 휴지가 공짜인 건 당연한 거고, 좀 좋은 화장실에 가면 기계가 물을 쏴서 따갑지 않은 뒷정리를 도와줘요."라고 말한다면, 물론 좀 놀라시겠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다. 아버지도 매우 똑똑한 분이기 때문에 낙관적인 경제 성장 예측을 토대로 휴지라는 재화를 미래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할지 예측할 수 있을 것이고, 양변기와 하수 처리 시설, 비데의 작동 원리와 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듣는다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를 활용해 큰 사업을 하셨겠지. 배관회사 재벌 2세 JDG... 생각만 해도 아쉽다.


그러나 변기 이야기를 하고 나서 아버지에게 "좌변기에 앉아 당신 아들은 스마트폰이라고 하는 손바닥만 한 전자 기계를 들고 심심함을 달랩니다. 무선 통신으로 전 세계가 연결돼있거든요. 누군지 모를 사람들과 협력해 3:3으로 실시간 전쟁 게임을 하기도 하고, 매월 미국 회사에 무선으로 설렁탕 한 그릇 정도의 값을 내고 무제한으로 컬러 영화와 드라마를 봅니다. 아! 심지어 당신 아들은 그 가짜 전쟁 오락 속에서 가상의 인물에게 옷을 입히려고 마을버스 수십 번 탈 돈도 기꺼이 지불하네요. 아무튼 그 요술 기계는 전화도 되고, 미적분도 풀어주고, 사진이랑 영상도 찍을 수 있고, 돈도 주고받을 수 있게 해 주고, 아무튼 안 되는 게 없어요."라고 한다면, 거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무선 통신이라는 개념도 생소할 것이고, 손바닥만 한 전자 기계라는 것의 모양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제한 영화와 드라마가 매월 설렁탕 한 그릇이라는 사기성 발언도, 미국 회사에 돈을 내는 해외 결제 방식에 대해서도, 구독이라는 모델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기의 경우와 달리 이걸 활용해 사업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모두 이해했다 하더라도 타이밍과 방식이 맞지 않아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게임회사 재벌 2세 JDG는 훨씬 매력적인 상상이지만, 전혀 아쉽진 않다.

뭐? 총에서 총알 대신 만두가 나가는 정신 나간 스킨을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다고? 출처: JDG 아카이브

멋진 신세계

컴퓨터는 미친 듯이 진화했다. 연산 능력도, 저장 능력도, 통신 능력도 불과 수년 전에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수준에 도달했고, 재밌게도 발전하는 속도만큼이나 단가도 빠르게 내려갔다. 전혀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 우상향 하는 하드웨어 가성비 그래프의 적절한 지점에 유용한 서비스를 내놓은 스타트업들은 휴지 회사와 같은 전통적인 기업이 상상하기도 힘든 속도로 규모를 키웠다. 그리고 경영의 기반 논리 자체가 다른 종류의 법인이 되었다. 물론 그 새로운 논리에 적응하지 못하면 변기 회사가 몰락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흐름으로 빠르게 잊힌다. 하지만 주커버그가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든, 소년 급제한 어느 벤처기업가가 놀러 다니다 트렌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폐인이 되든, 대부분의 고객들은 아무래도 좋다. 천재들이 깔아 둔 망 위에서 월 몇 천 원으로 도서도, 음악도, 영상도, 고사양 게임도 즐기고, 심지어 의식주도 간편하게 임대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조차도 너무나 당연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지만, IT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디지털 콘텐츠의 향유 비용은 퀄리티는 말할 것도 없고 정말 저렴해졌다. 참 좋은 세상이다. 나 어릴 때는 말이야, 영화 한 편 보려면 DVD 만원 넘게 주고 사 오고 어! 못 구하면 P2P 가서 720P 화질이면 파일x리 본사 쪽으로 큰절 한번 올리고 다운로드하여서 밤새 인코딩해서 PMP에 넣어보고 그랬어! 그러다가 코덱 지원 안 하면 소리 없이 자막만 보고, 까딱하다가 실수해서 컴퓨터에 깔린 바이러스랑 광고 프로그램 때문에 혼나고! 얼마나 편해졌는데, 감사할 줄 알아야지!

Latte is horse, 이런 걸로 영어학원 버스에서 테트리스도 하고, 귀여니 소설도 보고... 출처:

쉬운 재화, 쉬운 행복, 멋진 신세계는 공짜?

아무튼 이 정신없는 글의 결론은 두 가지이다.


1. 우리는 더 저렴한 가격으로도 행복해질 것이다.

희소성이 하락한 재화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니, '쉬운 재화'라고 하겠다. 휴지가 쉬운 재화가 된 것처럼, 콘텐츠 또한 쉬운 재화가 되었다. 쉬운 재화의 종류는 꾸준히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미래에는 우리가 지금 귀하다고 생각하는 재화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쉽게 누리게 될 것이다.


물론, 공기나 물처럼 예전에는 쉬운 재화이던 것들이 이젠 어려운 재화가 되고 있다. 미세먼지를 들이마시다가 든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산업 발전의 부작용일 뿐이다. 이 요술 약의 효과는 부작용을 상쇄하고도 남으며, 그렇기에 자본도 소비자도 복용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핸드폰 안 터지는 공기 좋은 오지에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극소수다. 멋진 21세기가 공급하는 쉬운 재화라는 소마는 효과도, 중독성도 최고다.


소마는 심지어 점차 발전한다. 예를 들어 좀 SF 같지만 신경과학이 발달하는 상황을 가정해보겠다. 매우 저렴한 가격의 장치가 인간 신경을 직접 자극해 극단적인 쾌감을 주면서도 신체에 별다른 손상을 입히지 않게 될 수도 있고, 컴퓨터 또한 이 속도로 계속 발전한다면 언젠간 사이버 공간 상 최고급 맨션에 살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브롤스타즈 캐릭터에게 사준 만 원짜리 옷은 단지 시각적 재미만 줄 뿐이다. 하지만 (아마도 내가 죽기 전의 가까운) 미래엔 지금 아파트 관리비 정도만 지불하면, 혹은 무료로, 갤러리아 포레 같은 집에 살고, 브리오니 착용감의 옷을 입고, 미슐랭 3 스타 수준의 음식을 맛보고, 쓰기 민망한 행위를 할 때 느껴지는 오감을 가상공간에서 동일하게, 심지어는 더 진보되고 정제된 형태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멋진 신세계가 오고 있다. 아마 다들 더 즐거워질 것이다. 나는 그 명작 소설이 디스토피아를 그린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의 유토피아를 그린 것인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2. 행복은 공짜가 아닐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결론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있다. 지하철 휴지를 공급하는 주체가 주로 정부 기관인 것과 달리,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 구글과 페이스북은 냉정한 영리법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빌딩 건물주님께서 카페 화장실에 화장지를 비치해두는 것은 성인군자라서가 아니다. 고용한 관리인이 그렇게 작은 비용을 투자하는 것이 건물이 돈을 벌어올 때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 수입원이 임대료인 건물도 그러한 논리로 작동하는데, 주 수입원이 무료에 가까운 콘텐츠인 IT 공룡들은 어떤 계산을 하고 우리에게 베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데이터이다. 나는 미래의 인터넷은 고객의 귀찮음을 모두 해결해주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본다. 훌륭하게 설계된 예측 시스템이 우리의 고민과 망설임을 모두 해결해줄 것이다. 이걸 완성해 모든 시장 영역을 다 먹기 위한 포석이 지금 우리에게 싸게 팔고 있는 소마가 아닐까. 물론 미래의 업그레이드된 소마를 나도 당연히 받아먹겠지만.


유의할 점은, 이들이 소마의 유통 권한이라는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됐을 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악마 같은 디스토피아의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결코 천사가 될 것이라고 낙관할 수도 없다. 지금 우리가 그들과 하는 거래가 우리에게 이익일 수는 있지만, 그쪽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이익이 될 수 있다. 나는 그런 거래는 찜찜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꿍꿍이가 확실하지 않은 기업의 견제를 위해선 합리적인 규제 시스템이 필요하다. 데이터의 활용과 규제 방안, 미래 정부의 역할 등에 관련해서는 할 얘기가 너무 많으므로 이후 포스팅의 소재로 사용하려 한다. 개인들 또한 어느 정도의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굳이 해로운 지도 확실치 않은 달콤한 소마를 끊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가 먹고 있는 약이 어떤 것인지는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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