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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ul 20. 2023

별을 노래했다

온타리오 작은 마을에서 열린 합창 캠프

모르는 사람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스팸이나 뭐 그런 종류의 메일은 아니었다. 흥미가 이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오웬 사운드에서 Choir Camp가 열리는데, 등록하라는 안내메일이었다. 우선 합창이라는 데에 방점이 찍혔고, 메일이 온 것은 2월쯤이고 캠프는 7월이니 생각할 시간이 무궁무진하니, 기억속에 저장해놓아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사람이 내 이메일을 알아서 이걸 보냈는지 의아했다.


어느날 아침 인터넷 접속중이었는데 페이스북 메신저가 떴다. 자신을 합창 캠프 기획자라며, 잠시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내 이메일을 입수한 경로도 궁금해서, 그와 잠시 대화했다. 내 메일을 우리가 사용하는 루터란교회 사무 담당자로부터 얻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한국인인 것이 너무 중요해 보이는 듯했다. 한국인 캠프 리더가 올것이라면서, 많은 한국인이 참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공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한국사람들"을 기대하는 것은 그의 과도한 욕심이 아닌가싶긴 했다. 나조차도 결심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합창은 "그리움"을 가진 단어이긴 했다. 노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합창을 좋아한다니 조금 맞지않는다. 합창은 어울림이 필연이고, 혼자 할수 없으며, 조금 더 나은 실력의 사람들에 업혀 같이 갈수도 있는 점이 좋다. 음이 낮아 소화할 수 있는 노래가 많지 않은데, 알토 파트는 내 목청에 맞고, 제대로 화음을 맞췄을 때 받쳐주는 그 느낌을 좋아하는 것같다.


중고등학교때 성가대에서 활동했던 것과, 고등학교에서 매년 열리던 합창제의 기억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40대에 전에 살던 페이슬리에서 동네합창단에 들어가서 몇년간 노래를 했었다. 일주일에 한번 연습했는데, 그 시간을 좋아하긴 했지만 아직도 아이들이 어려서 시간을 오로지 나를 위해 쓴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엄마가 없는 동안 아이들을 방치해두었어야 했었고 말이다. 그리고 또하나 일년에 두번쯤 콘서트가 열리는데, 애꿎은 가족들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합창공연을 와서 "봐줘야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내게 합창은, 부르는 사람들에게 기쁜 일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긴 어렵지 않나 하는 정도. 아는 사람의 공연이기에 응원차 간 것 빼고는 합창공연을 찾아가거나 했던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나의 합창공연을 보러오라고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공연때마다 갈등이 일었다.


그렇게 거리를 멀리하게 됐는데, 합창이라는 단어를 만나니 가슴이 살짝 뛰었다. 그래서 등록안내를 찾아봤는데, 꽤 정교하게 계획된 프로그램이었다. 하오 1시에 시작, 대합창단의 연습이 있고, 뒤이어 2개의 워크숍이 있고, 저녁을 먹고나서 1시간 30분 다시 모여 합창연습을 한다. 5일째인 금요일 저녁 공연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에 가기전에 이것을 결정하고 싶었다. 일터에는 아침부터 12시 30분까지 일할수 있다고 양해를 얻고, 일주일간 캠프를 참여해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4월에 등록을 마쳤다. 낮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저녁 시간에만 모여서 합창만 할수도 있었다.


이번 캠프를 통해 처음 접한 우쿠렐리 악기. 작은 기타라고 하면 되려나. 캠프파이어 노래 두곡을 연주하고 노래불렀다.


나는 두개의 워크숍 우쿠렐리(이곳 사람들의 발음은 이에 가까웠다, 한국에서는 우쿠렐레라고 모두가 말하는 것 같다) 초보자 코스와, 종이와 악기가 필요없는 아카펠라반을 신청했다. 이 두반은 모두 같은 선생이었는데, 언니의 추천이 도움이 됐다. 언니는 오웬사운드 커뮤니티 콰이어 멤버였는데, 그 선생의 음악적 접근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내가 등록한 사실을 알고 기획자는 내게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홈 스테이를 해줄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리더로 오는 사람들과 캠프 기간중에 Canadian Chamber Choir(캐네디언 챔버 콰이어) 단원들이 이곳을 방문해 공연을 하는데, 그들을 위한 머물 곳을 물색하고 있는 것같았다. 일면식도 없는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을 보면, 꽤 절실해보이기도 했다. 특별히 한인 음악가들을 초청하면서 한인집에서 머물게 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나홀로 사는 집도 아니고, 또 그당시 한국에 있을 때라 그 부탁에 "그럴게" 하기가 버거웠다. 한국방문으로 1달간 일을 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일주일 일을 하지않겠다고 할수도 없고. 일을 하면서 집에 머무는 사람을 챙기는 것도 쉽지 않고 말이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한국에서 언니와 나눴더니, 언니는 당연히 할수 없는 상황이면 못한다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조언을 했다. 나는 남편이 협조해주면 할수도 있을텐데, 하는 속마음은 있었지만, 여자 음악가가 머무는데 남편이 편안하기도 쉽지 않은 문제이므로, 내가 선을 넘는 부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기는 했다. 그렇게 해서 기획자에게 나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우리집에서는 홈스테이를 제공할 수 없다는 거절의 메일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다른 한인을 좀 찾아봐달라고 하기도 해서, 계속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나는 우쿠렐리를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조금 연습을 해봤다. 그런데 이건 또 아니올시다였다. 손가락이 구부러지지도 않고, 줄이 눌러지지도 않고.


마침내 합창캠프의 날이 밝았다. 아침에 일을 하고 캠프장으로 갔다. 모두 차로 10분 거리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첫날 악보를 받고, 바인더를 사고, 이름표를 목에 걸고 캠프장인 교회 강당에 앉았다. 정말 처음보는 악보, 쉽지않은 노래를 배우는데 옆에서 엉뚱한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지만, 잘 따라부르는 사람도 있어서 놀랬다. 두 번째 날이었던가, 헤매는 와중에 옆에 앉으신 분과 잠시 이야기를 했다. 잘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지휘자가 보내준 사이트에 들어가서 많이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것이라고 했다. 그랬다. 그간 자주 소식을 전해주던 그 많은 이메일중에 악보 파일과 그 노래를 부른 합창단의 유튜브 채널이 소개된 메일도 받았었다. 내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것뿐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다. 유튜브를 들으면서 내 파트를 연습하는 것. 5곡중에 한곡만 알토 파트를 피아노로 리드해주고, 다른 것은 공연을 녹음한 것이어서 파트 연습하긴 어려웠지만 음악을 익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합창에서 고전하고 있을때 내가 선택한 우쿠렐리 클라스도 매일 열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겨우 C코스 하나만 소화할수 있는 지경이었는데, 게다가 노래까지 하면서 F코드, G7 코드, Am 코드까지 짚어야했다. 이건 또 얼마나 힘들던지. 음악을 가벼이 대한 대가를 톡톡히 받는다 싶었다.


마치고 오면 8시 반이 넘고 그때부터 연습에 들어가서 12시 넘어까지 띵똥거리고, 피아노로 음계를 짚어보고, 과연 내가 공연무대에 설수 있을까, 머리를 수없이 흔들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장 만만한 클라스 하나는 아카펠라반이었다. 반복되는 리듬과 순환기법(?)으로 소프라노가 먼저 시작하고, 알토, 테너, 베이스로 이어지다가 다시 합창으로 가는 듣기에 아름답지만,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은 그 반은 그나마 숨을 쉬게 해주었다.


아이들 어렸을때 여름이면 음악캠프가 열렸었다. 그때의 어린애가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엉거주춤, 곁에 음을 잘잡는 누군가가 있기를 표안나게 기대하고. 남편은 학부모가 되어서 내 투덜거림을 들어넘기며 응원해주었다.


이번에 온 지휘자는 젊은 여성이었다.  일레인 Choi여서 한국인인가 했지만 홍콩에서 자란 여성이었다. 얼마나 유명한지는 잘 모르지만, 단한번도 “~~~ 음 그 음이 아니고~~~” 하면서 고개를 흔들지 않았다. 안되는 부분을 물고 늘어지지도 않았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골고루 손볼 시간이 없을 수도 있지만, 잘하는 부분에 감탄하면서 음을 모아나가는 느낌을 갖게 해줬다고 할까.


공연을 앞두고 “너무 수고했다. 최단기간에 이렇게 어려운 곡을 소화한 당신들이 대단하다. 실수해도 괜찮다. 그래서 우리가 합창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용기를 줬다. 리허설에 모인 합창단이나 지휘자나 모두 열정에 차서 공연성공을 확신하는듯, 분위기는 들떴는데, 나는 속으로 과연 이 공연이 성공할까, 검은 구름이 피어올랐다. 내가 빠져야 하나 그런 생각도 몇번 하기도 했다. “나는 이번에 포기하겠소” 라는  발설되지 못한 말이, 음악 리듬보다 앞서 있었다. 할수 없이 내가 가장 의지하는 그분께 나의 음을 잡아달라고 기도해야했다.


마침내 공연의 날이 밝았다. 오후에 연습과 무대 리허설까지 마치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공연을 맞이하게 됐다. 공연은 1부 2부로 나뉘었는데 1부는 각 클라스별로 발표를 한다. 우쿠렐리반이 오프닝을 맡았다. 다른반 가령, 뮤지컬 콰이어, 바버샵 콰이어, 아카펠라 등이 포함된다. 우쿠렐리는 귀엽게 봐달라는 의미로 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캠프화이어송 두 곡을 노래와 함께 연주했다. 뮤지컬 노래를 연습해 공연한 그룹이 있었는데, 그 실력에 놀라고, 또 합창곡들로 이미 포화상태인 내게 그 악보까지 겹쳤다면, 상황을 바꿔 생각하자, 그들이 더 대단해보였다.


별과 같은 어떤 것을 선택하세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 입힌 곡.


합창공연이 끝나고, 감동에 의해서인지, 정성에 감복해서인지 관중(대부분 가족이었겠다)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해주는 바람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옆에서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던 그분이 관중석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만 힘들게 느꼈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중에 그분에게 왜 공연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자신에게는 조금 힘들었다고 말하면서 특히 멘델슨의 곡 "There shall a star"가 어려워서 포기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년에 오겠느냐, 내년에 만나자고 말해줘서 또한번 놀랐다. 공연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관중석에 있었던 것도, 그리고 절대로 다시 해보고 싶지 않을 것같은데, 또 참여할 의사가 있는 것등이 말이다.


이번 합창제를 위해서 먼곳에서도 많이 왔다. 특별히 오타와에서 6시간 운전하고 와서 일주일간 air B&B에 머물렀던 한 분이 있었다. 우쿠렐리반에서 옆에 앉아서 만났는데, 음악성이 있고 적극적이었다. 남편을 떠나 일주일간 룰루랄라 놀러왔다면서 기뻐했는데, 놀라운 것은 자신은 "악보를 볼줄 모른"단다.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걸 배울만한 기회가 없었다며, 지휘자가 어디를 말하는 건지 처음엔 알지못해 혼났다고 말했다. 그녀의 아이들은 음악적 소질이 있어서 그 관련업에 종사하지만, 그 일이 돈이 되는 일은 아니지않느냐고도 말했다. 이번 캠프에서  그간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하면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그녀를 만나는 기쁨이 컸다. 또 한분과도 인사를 나눴는데, 그녀는 아들이 오웬사운드에 살고, 자신은 위니펙에서 왔는데 아들이 있는 이곳으로 이주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번호를 교환하기도 했는데, 전에는 음악선생이었던 것 같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분이었다. 그분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캐네디언 챔버 콰이어 공연때 곡이 끝났을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내가 목도했기 때문이다. 노래에 눈물을 흘리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으므로.


100명이 넘는 캠퍼가 참여했는데, 가장 특이한 점이라면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 했다는 점일 것이다.  12살 소년부터 94살 할머니까지. 최고령 할머니는 걷는 것도 웃는 것도 노래하는 것도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삶의 마지막까지 노래로 디자인하는 그 모습이 멋졌다. 할머니에게 함께 해서 감사했다며 이름을 묻고, 내 이름을 알려줬다. 이곳 오웬사운드에 사니, 언젠가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다음해 또 할거냐고 한다면, 또다시 고민해야 하겠지만. 중간중간에 발성연습 등도 있었고, 빨대를 이용한 호홉조절법등, 낯선 연습을 했고, 모르는 이들과 오며가며 같은 공기를 마시고 대면으로 했던 모든 것들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주던 두 음악선생 일레인 최와 루이스씨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그분들은 학생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용기를 갖게 해주었다.


이번 합창의 테마는 "별"이었다. 시 "가지않는 길"로 유명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Choose Something like a Star"에 곡을 입힌 이 노래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아간, 윤동주를 생각나게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무언가 높이 있는 어떤 것을 찾는 것, 그것이 합창이 준 어떤 교훈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이번 모임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도 있었고, 무대에 설수 없어서 앉아서 한 사람도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을 담아낸 우리들의 공연, 강제로라도 가족들이 와서 봐주지 않았다면 무척 서운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란 좋은 것만이 아니라, 응원이 필요할 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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