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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진 Feb 28. 2023

졸업 시즌이 지났다


가끔은, 이 모든 게 잘 짜인 하나의 연극이 아닐까 하는 별로 놀라울 것 없는 생각을 한다. 매 순간 장면에 몰입하여 마치 감각으로 느껴지는 세계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루를 보내지만, 내가 인지하는 오늘은 어쩌면 누군가의 각본과 다를 바 없다. 진하게 내린 커피를 마시고, 녹아내린 음지의 얼음을 보며 봄 내음을 한껏 느끼는 이 순간이 단막극의 장면이라 해서 받아 내지 못할 이유는 없다만.


일상극의 배우를 자처하는 내가 미운가? 자신에게 보인 미소와 열정이 죄다 연기, 혹은 거짓이었냐고 따져 묻는다면 그건 정당치 못한 처사다. 배우는 극의 사건에 가장 몰입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누구보다도 현상에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존재다. 의미 없이 흘러가는 하루에 진심을 쏟아내고, 격정이 치닫는 순간에 마치 ‘다 대본에 나와 있는 상황인’ 것처럼 관조하는 사람. 조광일의 랩 가사처럼 ‘없다가 있어도, 있다가 없어도 안 변하는’ 사람이 되고자 할 뿐이다.


그렇다면 졸업식은 일종의 커튼콜, 배우들이 손을 잡고 나와서 인사하는 시간이다. 주연과 조연의 구분은 의미 없다. 정의의 사도와 악당이 함께 팔을 흔드는 순간엔 그저, 함박웃음을 머금고 사람들과 눈을 맞추는 게 자연스럽다. 긴 시간 고생했다고, 희극과 비극을 왔다갔다 하는 이야기의 전개를 여기까지 끌어온 게 장하다고 치는 박수 소리를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이어질 다음 극에서 오이디푸스의 비극보다 잔혹한 전개가 기다리고 있다 해도.


내 인생의 주연이 나인 것은, 네 인생의 주연이 너라는 소리만큼이나 당연하다. 조연(이 글을 읽는 당신이 적어도 내게 엑스트라는 아니라고 확신한다)으로서, 또 한때는 관객으로서 내 조촐한 단막극을 채워줘서 고맙다. 연극이 끝난 후 헛헛하고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음은 오직 이들이 나를 지켜봐 준다는 따뜻함 때문이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기대하면서 잠들 수 있게 침대를 덥히는 건 비단 전기장판만은 아니다.


영어에서 졸업식은 graduation, 혹은 commencement라고 한다. 그런데 이 commencement는 재밌게도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대학생이라는 극은 여기서 끝났지만, 일상의 극을 이어가는 내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대학원 생활, 에버랜드 알바, 프랑스 거주.... 어디에 있든 무얼 하든, 남은 극의 대본을 써 내려가는 게 나라는 믿음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회자정리, 그리고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언뜻 보면 덧없어 보이는 인생의 회전목마 위에서 우리는 함께 춤을 춘다. 이따금 다른 파트너를 만났다가, 때로는 장면이 엇갈렸다가, 다시 모여 선율에 발을 맞춘다.  


은인, 혹은 빌런. 혹은 그 사이 어딘가.

그대가 훗날 어떤 가면을 쓰고 나와 함께 춤을 출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되어있기로 약속.


어느덧 고졸 탈출한지도 일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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