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센터에서 출고 알바 하루 뛰었다고 관절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른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스물한 살 즈음부터 영양가 없는 고봉밥처럼 잔뜩 쌓아두었는데 이제야 혈당 스파이크를 맞는 기분이다. 이틀을 예정했던 육체노동은 삐거덕거리는 팔을 핑계 삼아 미래에 맡겨두었다. 생활비가 바닥을 보이면 줄여야 할 커피와 햇살 역시 미래의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물음이 언제까지나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으로 남아있었으면 했다. 흙을 퍼먹어도 빛나는 20대는 고이 접어 바람에 나빌레라. 한 사람의 몫을 해가며 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품위를 챙기지 못하는 이 나이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물음은 그저 생존의 처절한 비명이다. 노동은 신성하다는 뽕에 취해 갓 스물 먹을 때부터 공장, 공사판, 상하차, 카페, 예식장 이리저리 맛을 봐 왔지만 내게 남은 건 ‘도무지 일머리 없음’이라는 딱지, 아울러 노동은 사실 신성한 게 아니라 지랄맞을 뿐이지만 그런 뽕이라도 있어야 하루는 더 살아간다는 눈물겨운 깨달음이다.
나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내가 발붙이고 숨 쉬는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린 이상 나를 둘러싼 것들은 곧 나를 이룬다. 그대들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이렇게 돌려서 한다. 아 물론 돈 빌려달라는 소린 아니다(너 정도면 10만원까지는 가능하다고 말해준 친구에게 감사를). 그저 나의 세계와 내가 상호작용하는 관계 위에서만 서로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어떠한 사람인지 궁금해질 따름이다. 나의 세계를 돌보는 게 결국 나를 돌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지금에선, 내 맘대로 살면서 몸부림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유익한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싶다는 욕심은 있으니까.
내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나의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부럽다나. 나이 먹으면 자신을 내려놓고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테지만 그 와중에 서핑보드 하나 챙겨서 파도 타고 있을 놈이라는 소리까지 들어봤다. 오 영광이어라, 살면서 나쁜 짓은 조금씩만 하고 살아야겠다.
모범적인 사람이 되야겠다는 다짐은 니체를 읽으면서부터 꽤 내려놓았다. 타인에게 목적지의 모습이 된다는 건 멋쩍은 일이다. 최후방어선 정도면 어떨까. ‘저렇게 살아야지’가 아니라 ‘저렇게도 살아는 지는구나’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성공이다. 낭만을 외치며 기행을 일삼는 나를 봐서라도 그대들은 하루를 더 세상에 발을 붙여달라. 그대의 삶을 긍정하며, Amor Fati..
언젠가 이런 생활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올 테다. 그땐 지나고 보니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회고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가볼 수 있을 때까지는 가보려 한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섬으로의 항해를. 잔치가 끝나는 지점에서 일상은 시작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