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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진 Apr 26. 2024

대학원을 휴학하고 에버랜드 옷을 입었다

어처구니없게 세상이 내 편인가 싶은 순간들이 있다. 재료 소진된 맛집에서 딱 나까지만 입장을 받아준다든가, 아껴먹던 청포도 사탕 마지막 녀석을 뜯어보니 쌍알이 들었다든가 하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랬는데 이럴 때면 웬걸 웃음이 나온다. 팡 터지는 함박웃음이 아닌 소소하게 자아내는 실소로 채워가는 순간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라는 말이 익숙한 시대에 살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휴학의 연장선에서, 에버랜드에서 일을 해보자는 결심이 섰다. 생활비는 떨어졌고 석사과정은 스스로 벌어먹어서라도 끝내야 하지만 무엇보다 버킷리스트라는 그럴듯한 낭만이 있었다. 용인으로 처소를 옮기고 부서 배치를 받는 날은 퍽 잠을 설쳤다. 웬만한 동기들보다 쌓아 올린 밥그릇 개수가 많으니 의젓하게 있으려 했던 게 계획이라 적잖이 낯부끄러웠다. 에버랜드는 대다수 캐스트(아르바이트생)가 직별 구분 없이 들어온 뒤 3일간 교육을 마치고 각자의 부서가 정해진다. 놀이기구를 직접 다루는 ‘어트랙션’과 같이 인기 있는 부서는 그 보수가 최저임금 수준이어도 늘 수요가 많고, 식음 부서인 ‘F&B’에는 수요가 적은 만큼 보수가 상대적으로 높다.


첫날 교육 때 친해진 동기들과, 우린 아마 F&B에 배정될 거라고, 절반 넘게 그곳에 배정된다던데 어찌 피해가겠냐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한식당으로 갈지 팝콘 판매대로 갈지 서로의 매장을 골라주면서 놀려대던 게 액땜이었을까. 나는 기대 저편에 있던-그렇지만 너무도 가길 원했던-어트랙션 부서에 배정되었다. 세상은 역시 어처구니없이 가끔은 내 편이 된다.


환상의 나라 에버랜드에서 환상의 수호자를 담당하는 매직랜드 캐스트들의 업무강도는 유아 손님의 키 제한에 비해 낮지 않았다. 이들은 어린이보다 앞서 들뜨는 열정과 어린이보다 잔잔히 가라앉는 차분함을 배운다. 탁월한 코미디언은 자신의 개그에 웃지 않듯, 흠뻑 동심에 담갔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털어내는 모습은 마치 방수 깃털을 달고 호수를 유유자적하는 백조의 고상함을 닮았다. 가끔은 덩치 큰 ‘어른이’들의 해맑음에 당황하면서도 유들유들하게 맞춰주는 카멜레온이 되는 일도 꽤나 신선했지만 체력소모가 컸다.


어린아이 좋아하느냐는 질문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직종,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답을 내놓곤 했다. 원체 자그마하고 귀여운 것들이 좋아, 붙잡고 있는 취미도 뜨개질이고 종종 가는 봉사도 유기동물 보호소였다. 어린이들이 티 없이 맑게 웃는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골치 아프게 구는 모습까지 사랑하긴 쉽지 않다는 게 동료들의 중론이었는데, 나야 뭐 교육자도 아닌 마당에 아이 어리광에 무한책임을 지고자 하는 무게감은 없었다. 너무 재밌다며 줄서기를 거부하고 또 타고 싶다며 떼를 쓰는 아이에 곤란한 기색을 내비치곤 했지만, 진정 난처한 마음으로 아이를 안아 데리고 나가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아이의 보호자였으니.


사랑까진 아니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부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더라도 누가 부자처럼 살게 해준다면 마다할 사람이 어딨겠는가. 하루는 노랑 검정 줄무늬 차단봉을 유심히 보던 어린아이가 제 엄마를 잡아당겼다. 그 모습이 계란초밥을 닮았다는 거다. 맛있겠다며 침을 꼴깍 삼키던 아이를 보며, 나는 출근길에 별안간 눈물이 왈칵 맺혔다. 세계의 다채로움을 망막에 담아낼 수 있는 눈을 언제부터 나는 잃어버렸던가. 기능과 쓰임새로 점철된 것들에 둘러싸여 만물이 품은 빛과 색을, 소리의 울림을 더는 느끼지 못하게 되었나. 겉 눈물은 그새 닦았지만 정작 목놓아 울고 싶은 건 속마음이었다.


어른스러움과 순수함을 맞바꾼 거래를 무를 수는 없었다. 더불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혼자만 어린아이처럼 군다면 피해는 주변 동료들이 볼 터. 여하튼 답은 뒤에 있지 않았다. 인간의 다리는 앞으로, 전방으로 넘어지면서 동시에 균형을 잡으며 가게끔 설계되어있으니까. 다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앞마당에 끌어와 담아낸 정원처럼, 모방이라도 좋으니 어린아이가 세상을 대하는 생동감을 이따금씩이라도 내 삶에 불러올 순 없을까 고민했다.


그 어떤 재미난 일도 반복이라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 생동감에는 저마다의 유통기한이 찍혀있다. 돌을 산꼭대기까지 올리면 다시 저 밑으로 굴러떨어져, 끝없는 과업의 쳇바퀴를 돌리는 시시포스 이야기에서 자화상을 마주하는 게 현대인이다. 청동을 녹슬게 하는 시간은 그토록 일상의 낯섦을 바래게 하는 힘이 있다. 계속한다는 것, 반복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망각. 잊음이 그 해답이 아닐까 생각했다. 매 순간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살아낼 수 있다면. 일어났던 일이 비슷한 결로 무수히 반복된다 해도 처음 살아보는 것처럼 일상을 긍정할 수 있다면 어떨까. 에버랜드는 그러니 내겐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많은 이들이 한 번쯤 해보고 싶어한다는 놀이동산 알바엔 형형색색 채도 높은 일들이 펼쳐질 테니 어쩌면 회색빛 권태로움에서 탈출할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로운 일에 대한 설렘, 예쁜 옷에 대한 동경, 놀이동산 특유의 몽글몽글한 분위기는 채 삼 개월이 못 갔다. 내일 어떤 손님들이 내게 산뜻한 기쁨을 가져다줄까 하는 기대로 잠든 시절이 분명 있었지만 반복의 저주는 이번에도 자비 없이 찾아왔다. 안내 멘트 하나에 해맑게 웃어주는 어린아이들을 보고도 어느덧 가슴이 콩닥거리지 않았다. 나는 끝내 오늘을 마주함에서 어제를 잊지 못하였으니 실험은 실패라 할까.


일부를 보고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어쩌면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의 단면에 과도한 기대를 걸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무가 꽃을 예쁘게 피운 모습만 보고자 하는 마음은 매주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하는 마음과 다름없다는 말이 있다. 일생에서 결혼이 찬란한 순간일 수 있음은 반려를 만나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앞으로 반려와 함께 보낼 무수한 날들이 받쳐주기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벚나무는 꽃이 지고 나서야 잎을 틔우고, 한여름 햇살의 따가움을 견딜만한 건 봄꽃이 아닌 바로 그 가로수의 잎 덕이다. 내가 좋아하는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은 없다.”


매일매일을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어린이의 삶을 체득하는 경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숯검댕이라도 플라스크에 남긴 게 있다. 망막에 처음 맺히는 것처럼 세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존재하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때는 좀 묻었을지언정 환상의 화려함이 아니더라도 일상은 기꺼이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다름 아닌 환상의 나라가 가르쳐주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겠지만 말이다.


시크릿쥬쥬비행기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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