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의 “사”자도 들어보지 못한 당신에게 바칩니다.
직장 사수: 직장에서 자신의 업무를 바로 위 직급에서 봐주는 사람을 말한다. (네이버 오픈사전 출처)
벌써 7년 차 직장인. 세 번째 직장이다. 세 회사 모두 스타트업이었던 탓일까? 난 단 한 번도 사수를 만나는 호사(?)를 누려보지 못했다.
물론 사수가 도라이라면 매일이 지옥일 것이다. (사수의 다른 뜻으로 “사사로운 개인의 원수”가 있다.) 하지만 사수는 필요하다. 정확히 말하면 있는 편이 좋다. 사수 없이 직장 생활에 적응하고, 업무를 익히고, 성과를 내는 요령을 터득하기란 쉽지 않다.
사수가 없다는 건 나의 업무에 도움을 줘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내 일도 하기 싫어 죽겠는데 다른 사람의 일까지 뭣하러 신경을 쓰겠나.
그러니, 취업을 했는데 사수가 없다? 이 말은 “눈치껏 적응하시어 알아서 성과를 가져오세요.”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더군다나 당장의 생존도 불투명한 스타트업에게 어떻게 사수도 없이 일을 시키느냐고 불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정신없이 굴러가는 스타트업 환경을 처음 접한 신규 입사자는 업무는커녕 분위기 파악하느라 에너지를 다 쓸지도 모른다. 실제로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분들은 나에게 대체 이런 데서(?) 어떻게 계속 일할 수 있냐고 하소연한다.
그들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고, 첫 글을 이 주제로 잡아보았다. NO사수 NO체계 스타트업에서 몸통 박치기로 커리어를 쌓고 그 노하우로 서울살이를 제법 잘 영위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몇 자 올려본다.
*내 글이 가장 현실적이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호호.
만약 내가 주니어인데 사수가 없는 회사를 선택했다면 내 힘으로 업무를 헤쳐나가겠다는 각오를 넘어선 "객기"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커리어에 큰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은 주니어를 가르칠 시간과 역량이 없다.
스타트업은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유연한 업무 환경을 제공할 테니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가져와 보렴."이라고 말하는 곳이다. 물론 채용 공고에는 유연한 업무 환경만을 강조했을 것이다. 스타트업이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핵심은 바로 그 뒷말이다. 스타트업, 소기업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직장인으로서 리스크가 큰 선택지다. 스타트업에서 개인의 성과는 회사의 성장과 직결되고 이것은 나의 생계 그리고 커리어의 질을 결정짓는다. 그러니 내가 이러한 환경에 적합한 사람인지 또는 지금이 적합한 타이밍인지 꼭 따져보아야 한다.
내가 사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평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왔는지”를 되짚어 보는 것이다. 반드시 직장에서의 사례일 필요는 없다.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사수 없이 일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1)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2) 그로 인한 결과를 학습하고 성장할 수 있다.
3) 누군가의 지시 없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도) 즐겁다.
[나의 사례를 예시로 들어보면 이렇다.]
직면한 문제: 입시에 실패했다. 집안 형편은 좋지 않고, 현재 4, 5등급이므로 최소 2등급 이상 올려야 원하는 학과에 진학 가능하다.
1) 계획과 행동: 재수학원은 포기하고 독학으로 진행한다. 단, 고3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공부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니 상위권 친구들의 공부법을 베낀다. 수능일까지 롱런하기 위해 너무 무리하게 계획을 짜지 않는다. EBS 교제에서 70퍼센트가 수능으로 출제된다니 EBS의 모든 교재를 외우듯 공부한다. 1년간 모든 유흥은 끊되 일주일에 하루는 쉰다. 체력이 약해서 뒷심이 부족했으니 웬만하면 이동시에는 걷는다.
2) 결과 학습과 성장: 6월 모의고사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이대로 유지한다. 욕심부리지 말고 지금부터 마인드 컨트롤하고 체력을 관리한다. 수능 결과는 6월과 동일했고 원하는 학과에 합격했다.
3)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스스로 계획을 세워 문제를 해결하는 걸 즐기는 타입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는 취직 후 업무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고, 사수가 없는 환경은 이런 나에게 오히려 편했다. 물론 성과를 내기에도 적합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떠오르지 않거나,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이 너무 고통스럽다면 사수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걸 추천한다. 못해도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최소 3명 이상의 "팀"에 소속되는 게 현명하다.
하지만 이미 사수가 없는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이직을 준비하자. 진심이다. 스타트업이 마치 모두에게 이상적인 환경인 것 마냥 떠드는 사람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함께 만들어요!"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어요!"와 같은 말이다. 누군가는 허허벌판에 땅을 고르고 씨앗을 뿌리는 일이 잘 맞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다 자란 나무의 열매를 연구하는 일이 잘 맞을 수 있다. 나에게 더 맞는 환경을 선택하자.
사수 없이 일하는 게 성향에 맞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가? 하지만 당장 이직은 어려운가? 그렇다면 포기하지 말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보자. 나의 업무 성장에 사수가 늘 답인 것은 아니니까.
당장 실행에 옮겨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무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관찰하고 따라 해 보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롤모델이라고 따를만한 사람이 없을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일을 못한다고 매일 욕먹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일을 하는지, 구성원들이 잘했다고 평가하는 일은 어떤 형태인지 관찰해보자. 그리고 나의 업무 방식에 적용하고 응용해보는 거다. 좋은 점은 그대로 따라 해 보고 나쁜 점은 절대 하지 않는다.
나는 주로 리더들의 시행착오를 지켜보곤 했다. 능력은 없는데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리더가 이끄는 팀은 구성원들이 그의 의견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으니 비효율은 커지고 감정의 골은 깊어져 갔다. 결과적으로 팀의 생산성이 떨어졌다.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효과적인 리더십은 내 능력을 신뢰하게 하는 것이다.", "이 곳은 고압적인 태도가 먹히지 않는 곳이다." 등의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들을 기반으로, 실제로 내가 팀을 이끌어야 할 때 적용해보았다.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전에 이슈를 함께 논의하는 시간을 짧게 자주 가졌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했다. 이는 Top-down으로 밀어붙이는 것에 비해 시간과 비용(특히 나의 비용)이 필요했지만 오히려 장기적으로 내 업무의 효율을 올려줬다.
또한 구성원들이 수평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생각을 "들어주는 척" 했다. 이런 쇼맨십은 필요한 것이었다. 먼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태도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구성원들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실제로 업무 성과에도 좋은 결과가 있었다. 가설이 워킹한 것이다. 물론 언제나 가설이 맞지 않을 때도 있다.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가설에 대한 결과를 학습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식으로 관찰하고 가설을 세워 일을 하다 보니, 나름의 업무 스킬이 쌓여갔다.
만약 내부에서 벤치마킹할 만한 사례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면 자기 계발서나 아티클, 외부 콘퍼런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다만 그저 "지식"을 쌓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와 동일한 원리다. 동일한 지식을 직접 업무에 적용하고 결과를 학습해보자. 그제야 진짜 내 것이 되고 성장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회사의 유일한 디자이너라면,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가 필요한 모든 일은 당신의 몫이다. 디자이너가 아닌 다른 직군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회사의 규모가 작을 때는 업무가 세분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문인력이 공석인 상황에서도 그때그때 처리해야 하는 일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니 스타트업에서는 직원 대부분이 소위 멀티플레이어가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멀티플레이어로 일하는 디자이너들은 회사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회사가 요구하는 일을 한다. 나 역시 UX/UI 디자이너로 입사한 첫 회사에서는 광고 이미지뿐만 아니라 후킹 문구까지 작성해오라고 했고, 심지어 인사 관리를 겸직해보라고 하기까지 했다. 난 뭔가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케터도 인사팀도 없는 상황에 저항해보아야 무엇하나 하는 생각으로 그 일들을 받아주곤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장하고 있는 회사라면 영원히 멀티플레이어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전문 마케터가 입사할 것이고, 인사팀이 운영될 것이다. 즉, 분업화가 되고 업무는 매우 세분화될 것이다. 이때는 회사가 규모가 커졌다는 것이므로 마음껏 기뻐하자. 하지만 이 시점에 스타트업 초기 멤버들이 현타를 느끼기도 한다. 특히 멀티플레이어로 회사에 기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회사와 서비스의 레거시를 가장 많이 알고 있고, 규모가 작았을 때 고생은 고생대로 다 했는데, 정작 나는 어떤 분야에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다시 말하면, 이력서에 나를 누구라고 소개해야 될지 애매한 상황에 맞닦드리고, 내가 담당했던 어떤 분야가 드디어 팀을 꾸리게 되어도 내가 리더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가장 피해야 될 시나리오다.
그렇다고 "전 UI 디자이너니까 로고 디자인은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제품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에 참여하고 관찰해볼 수 있다는 게 스타트업의 가장 큰 장점인 만큼, 내가 조금의 학습을 통해 해낼 수 있는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또, 아직 내 전문성을 어떤 방향으로 키울지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여러 업무를 맡아보면서 나의 적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직장인"으로서 생계를 유지할 계획이라면, "나는 OO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전문 분야와 타이틀은 결국 필요해진다. 그러니 할당받는 업무도 나의 전문분야에 더 많이 집중되어 있어야 하고, 외부에 나의 전문성을 증명할 수 있는 케이스(포트폴리오, 업무성과, 직책 등)도 차곡차곡 쌓아두어야 한다. 만약 나의 역할 변화가 너무 잦다면 리더(때에 따라서는 대표가 될 수 있겠다)와 논의해서 나의 Career path를 확실하게 하자. Career path는 쉽게 말해 나의 커리어의 정점에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인가에 대한 큰 그림이다. 영원히 리더 또는 Specialist가 되지 못하는 Career path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의 경우, UX/UI 디자이너 > PM > PO의 테크를 탔고, 현재 Product Designer이자 PO로서 일하며 제품 기획 및 UX디자인 전문가로서 외부 강연을 하는 등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경력과 배경을 가진 디자이너 중에서 본인의 전문분야가 여전히 모호한 사람들이 있다. 그가 무능력한 사람이거나 회사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어디에 전문성이 있는지 외부의 시선에서 공감할 수 있는 형태(위에서 언급한)로 설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업 입장에서는 그의 연차에 상응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 쉽지 않아지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오랜 세월을 함께한 기업도 그에게 권한을 주지 않을 수 있으니 허무하고 슬픈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커리어의 정점에 원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면, 지금부터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자. 특히 스타트업이 첫 커리어인 주니어는 꼭 기억해두자. 아무도 당신의 커리어를 관리해주지 않는다. 시간이 결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본인의 커리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회사의 성장과 개인의 성장은 함께 갈 수 없다.
브런치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간결하고 짤막한 콘텐츠로 채워야겠다 마음먹었는데 첫 글 부터 망했다. 나는 젊꼰 TMT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