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전시를 보고
나는 미술관보다 박물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아에 대한 큰 고민들을 내려놓고, 나보다 거대한 것과의 연결감을 느끼고 싶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이 필요할 때면 문화 예술을 찾게 된다. 문화 예술에는 삶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는 듯하다. 국립 중앙 박물관과 국립 현대 미술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이라는 전시명을 보고, 아 여기라면 나를 자아의 우물에서 꺼내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촌역으로 향했다.
날씨가 참 예쁜 날이었다. 국립 중앙 박물관 가운데에 호수가 너무 예뻐서, 햇볕이 따사로워서 잠시 앉아있다가,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으로 따땃한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볼펜으로 눈에 담기는 풍경을 그렸다.
그림을 그려본 게 얼마 만이지? 6년 전 미국 여행 다닐 때 한 미술관 입구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너는 어떤 아티스트야?”라고 물어봤더랬다.
“아, 저는 아티스트는 아니에요.” 겸연쩍게 대답한 내게 “아티스트가 아닌 사람은 없어. 작더라도 계속 그림을 그려. 멈추지만 마.”라고 할아버지는 답했다.
그 후로 놀라우리만치 그림을 그릴 일이 없었다. 무언가를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든 적이 딱히 없는데, 오늘의 이 약간 뜨거운 햇빛과 파란 하늘, 고요한 물결과 윤슬, 정자의 모습은 차분히 풍경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사진으로 담는 것과의 차이는, 풍경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눈에 담게 된다는 것. 당연히 잘 그리는 실력은 못되지만, 초중학교 시절 미술 학원을 꾸준히 다녀서인지 펜을 휘두르는 것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리다 보니 2년 정도 미술을 배우고는 친구 사이가 되어버린 나의 옛 미술 선생님이 생각나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전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최초로 ‘기록’을 했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어, 기록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고, 생활하고, 서로 관계를 맺었는지를 담백하게 보여주는 전시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해 당시의 철학과 과학을 후대에 전하며 인류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고대 문명으로 현대 사회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이집트 문명과 같은 다른 고대 문명에 비해 크게 조명받지 못해 그러한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이 전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요 성취를 소개하되 전문적 배경 지식이 없이도 관람할 수 있도록 문자, 인장, 종교, 초상미술 등을 접점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 전시 설명 중
4천 년 전에 이미 사람들이 도시를 꾸리고 살았다니. 도시 문명이 발생하면서 자신이 생산한 것으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교환이 필요해졌고, 이를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회계와 수학이 필요했다는 것, 그렇게 그들은 쐐기 문자를 발명하고, 이를 이용해 회계장부와 십진법을 고안해 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설명을 읽고 있자니 아득했다. 복잡도가 증가했을 뿐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본질과 놀라우리만치 같잖아? 4천 년 전인데. 4천 년.
우두머리의 두상, 돌에 새긴 기록물들, 그림, 지금 유리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 보고 있는 이 모든 물건들이 최소 2천 년, 최대 5천 년 전 물건들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아득하고 소름이 끼쳤다.
이 연결감. 명상에서 많이 느끼는 감각이다. 명상이라고 하면 나라는 개인 안으로만 침잠하여 들어갈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다. 나와, 주변, 이 세계와의 연결성을 느끼는 호흡 명상을 하다 보면 마음이 참 편안해진다. 내가 이 지구에 홀로 똑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동물들, 자연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 들면서, 고독감은 줄어들고 세상에 대한 긍정감과 애정이 자란다. 명상을 통해 이 연결감을 느끼는 연습을 하면, 일종의 근육이 자라나 일상 속에서도 타인이 나에게 주고 있는 영향들에 더 잘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이를 테면 오전에 나에게 인사를 건네주는 카페 사장님의 친절함에 감사하게 되고, 자신의 지식을 공유하는 동료에게 감사하게 되고, 오늘도 제 자리를 지키며 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수많은 이들의 노동에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연결감은 동시대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내 이전에 존재했던 인류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는데, 오늘날 내가 쓰고 있는 글과 숫자, 수학과 회계학, 천문학, 심리학, 인권과 민주주의 개념은 모두 나에 앞서 살아왔던 인류가 하나씩 치열하게 쟁취한 것들이다. 이렇게 연결감을 느끼면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새삼 달리 보이고 감사해지는 마법이 벌어진다.
박물관은 눈앞에 그때 그대로의 유물과 유적들을 내 눈앞에서 보면서 (이 또한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로 가능한 일이다 - 뉴욕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큐레이터와 수많은 보존 전문가들), 종적으로 내 이전에 이 지구를 지나온 사람들과의 연결감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그들의 흔적을 보고 있자면 겸허해진다. ‘에고라는 적’이라는 책에서, 현대인들은 꼭 우리가 특별한 시대에, 특별한 하늘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100년 전에도, 1000년 전에도 사람들은 똑같은 하늘을 보고 있다는 구절을 읽고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특별한 세대에 살아가고 있는 특별한 개인이라는 생각은 신나지만, 사람을 외롭고 불안하게 한다. 이런 에고는 나의 특별함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나는 좀 더 대단하고 멋진 것을 성취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역사와의 연결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를 겸허하게 하고, 그리하여 이 작은 티끌인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에 대해 겸손하게 고민하게 한다. 이때의 고민은 자아에 대한 살찐 고민과는 달리 샐러드 마냥 좀 더 산뜻하다. “어차피 나는 티끌인데, 이왕 사는 거 어떻게 좀 더 잘, 행복하게 살아볼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부풀려진 책임과 부담을 내려놓고 말이다.
그래서 난 박물관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