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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헌 Jul 14. 2021

네이버 웹툰 <당신의 과녁>

죄와 복수, 용서에 대한 이야기

(타이틀, 본문 사진 출처: 네이버 웹툰)


누구나 억울한 경험이 있다. 그중 누군가는 눈물이 날 정도로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분노하고 원망했을 것이다. 복수를 꿈꿨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면? 하루아침에 연쇄 살인범이 된다면? '권선징악'을 믿었지만 정작 진범은 평온히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면? 누군가 진실을 알았음에도 모른 척했다면? 그렇게 17년을 감옥에서 썩다가 그때서야 무죄가 입증된다면? 하지만 나만큼이나 내 주위 사람들도 '나로 인해' 고통받았음을 알게 된다면?


이것이 <당신의 과녁>의 기본 설정이다. 충만한 삶을 살던 최엽은 억울하게 1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 후 복수를 꿈꾼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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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호 작가님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의 스토리에 있다기보다는 섬세하고 핍진성 있는 묘사에 있다.

작품을 읽다 보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인물의 심리는 이렇겠구나,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겠구나, 가족들은 이런 일을 겪겠고, 이런 마음이겠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 핍진성: 문학 작품에서텍스트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다고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정도) 


캐릭터들 역시 '이런 사람이 어딨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정말로 주위에 있을 법하게,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캐릭터들이 평면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무조건 선하지도 무조건 악하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캐릭터들을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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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작품일수록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스토리를 더 나열하는 것보다, 이 작품이 내게 던진 물음들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보면서 글을 마치려고 한다.


- 주인공 최엽의 삶을 망가뜨린 건 누구인가?

팩트체크 없이 '이슈'만을 위해 글을 쓴 기자? '사회생활'을 배운 경찰? 진범? 진실을 덮은 진범의 가족? 최엽의 가족을 비난하고 괴롭힌 대중들?


모두 맞지만 틀리다. 최엽을 범인으로 만들고 그의 삶을 무너뜨린 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이 모든 걸 가능케 하고 종용했던 시스템의 문제다.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개인을 내모는 시스템을 외면한 채 개인의 잘못으로 모든 책임을 전가하면, 비극은 되풀이된다.


- 당신의 과녁은 어디로 향하는가?

최엽의 화살은 신을 향해, 친구를 향해, 옛 애인을 향해, 진범의 가족을 향해, 자신을 향해 날아갔다. 물론 그 누구의 가슴에도 박히지 않는다. 아마 올바른 과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는 화살을 만든다. 화살을 집어 든 우린, 과녁을 찾는다. 

웹툰에서 잘못된 과녁을 향해 날아간 화살은 꽂히지 않는다. 

현실은 다르다. 잘못된 과녁일지라도 꽂힌다. 


당신(나)의 화살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 해피엔딩, 그 후의 삶

<방백남녀>의 마지막 장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최엽은 다시 웃는다. 하지만 마지막 컷 속 최엽의 표정이 (작가님이 의도하지 않았더래도) 내겐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 앞 장면에서 신부인 최엽의 친구가 묻는다. 

'마음은 좀 평안하니? 괴로움은 가셨어? 상처는 어때, 좀 아물었니? 스스로 일어날 만큼의 회복은 된 거야? 네가 받은 사과와 보상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때론 지난 감정이 불쑥 뛰쳐나올 땐 없는 거야? 다시 잘 웃던 너로 돌아왔다지만 그 웃음이 한치의 티끌 없던 그때의 웃음인지, 실은 여전히 남아있는 괴로움 위에 덧칠하는 웃음인지, 난 늘 궁금해.'


작가는 이에 대한 최엽의 대답을 보여 주지 않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이에 대한 최엽의 대답은 'NO'일 것이라 생각한다. 기적처럼 '코끼리가 매달려고 끊어지지 않는' 밧줄이 끊어지고, 어머니가 다시 의식을 차리면서 최엽은 다시 살아보기로 한다. 그토록 원망했던 하늘을 바라보면서.


최엽은 '모든 건 신의 뜻이라' 생각하며 살아갈까? 왜 이런 시련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다시 기회를 줬음에 감사하며 살아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17년의 시간은 사라졌으며', '가족들은 잊지 못할 상처를 받았고', '죽을 만큼 사랑하던 연인도 잃었다'. 아마 최엽은 다시 삶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기보다는 '그럼에도 살아가길' 선택한 게 아닐까. 마치 끊임없이 바위를 정상에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말이다. 예전처럼 삶이 행복으로 가득하고 충만하지 않다는 걸, 아니 오히려 삶이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하다는 걸 꺠달았을지언정,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는가. 시지프스도 웃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 '용서해라'는 말의 가벼움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용서의 사전적 정의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빈약하다.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가 적극적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책임지려는 일련의 과정'이 수반되어야 완성된다. 이런 과정 없이 진정한 용서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혹자는 용서가 '현명한 선택'이라 한다. 용서함으로써 스스로 과거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분명 어느 정도 옳은 말일 것이다. 다만, 제대로 원망하고 분노조차 표현하지 못한 이들에게 이런 '용서'를 권유하는 것이 옳은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섣부른 용서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발산할 기회를 박탈하고, 가해자의 죄와 책임을 드러낼 수 없게 한다.

<당신의 과녁>에서 결국 진범과 진실을 은폐한 진범의 가족은 처벌받지 않는다. 아니, 진실을 은폐했다는 죄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래서 더 씁쓸하다. (놀랍게도) 많은 독자들이 복수가 성공하길 바란 이유가 이에 있지 않을까.


- 너와 우리가 필요한 이유


<방백남녀>부터 작가는 상처 입은 인물이 이를 극복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작품 속 최엽이 말하는 것처럼 상처와 고통은 개별적이다. 나는 너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고 너도 나의 고통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를 극복하는 데 핵심적 계기가 되는 건 '타인'이다.  여주에겐 남주가, 남주에겐 여주가 있었으며(<방백남녀>), 최엽에겐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었다.


이런 구조가 고태호 작가의 작품들에서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힘을 얻고, 감동을 받는 게 아닐까 싶다.


최근 <별것 아닌 선의>라는 책을 읽었다. 세상을 바꿀 만큼의 대단한 일은 하지 않아도, '작은 선의'를 실천해 나가는 교수님의 글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고태호 작가님도 그런 '사소한 선의'를 실천하고, 비정한 현실에도 '최소한의 인류애'에 대한 믿음이 있는 그런 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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