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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숲 Sep 10. 2020

애런이 아빠에게 ‘장인어른’이라고 부른 날

결혼 1주년을 기념하며

우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7년을 연애했다. 그리고 작년 여름의 끝자락,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내 주위의 모든 결혼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우리의 결혼을 계획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의 관계는 결혼에 대한 열망 없이도 안정적이고 따뜻한 대화들 속에서 잔잔하게 흘러갔다.


물론 모든 대화의 강이 잔잔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연애는 한국이라서, 미국에서의 연애는 미국이라서, 각각의 파문이 다른 모양으로 일었다. 국제 연애를 바라보는 모든 종류의 선입견과 부정적인 시선부터, 장거리 연애라는 물리적인 문제까지.


그래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강에 배를 띄웠고, 함께 노를 저어 갔다. 한 사람이 쉬면 다른 한 사람이 힘을 냈고, 또 한 사람이 쉬면 남은 한 사람이 노를 저었다. 나는 노를 젓다가, 애런과 함께 손을 잡고 배 위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의 모든 불같고 지독했으며 이기적이었던 연애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나 보다. 


불같이 일렁이는 마음과 지독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일 때마다, 그 마음에 서로 베였던 과거의 연애를 떠올렸다. 그와 나에게 그때와 같은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은 신중하게 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고맙게도 그의 말들은 대부분 따뜻했고, 따뜻하다.


나와 애런은 비슷한 가치관에 비슷한 취미를 가졌다. 가치관이 비슷해서 인생의 큰 틀을 놓고 다툴 일이 잘 없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보드게임, 자전거타기, 게임, 산책, 커피.


그러나 우리는 비슷한 가치관과 취미를 공유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나는 한국인, 애런은 미국인. 


국적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음은, 말다툼을 할 때 우위를 점령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내뱉곤 했던 ‘상식적으로’, ‘일반적으로’ 같은 단어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와 나의 상식과 일반은, 각자의 나라와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서 성숙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가장 힘든 과정이었다. 


나는 주로 감정적인 사람이고 애런은 주로 이성적인 사람이다. 나는 주로 나쁜 확률을 배제하는 긍정적인 사람이고 애런은 주로 나쁜 확률에 대비하는 부정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의 20% 강수 확률을 체크하며 우산을 가져가지 않지만, 애런은 그 20%가 걱정되어 우산을 챙긴다. 


나는 멍 때리는데 선수지만 애런은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나는 1분 만에 자지만 애런은 생각이 많아 잠들기가 어렵다. 나는 새벽녘 밖에서 들리는 새끼고양이 소리에 잠깐 걱정하다가 꿀잠을 자지만, 애런은 자신이 새끼고양이를 구하지 못해 행여 밤새 잘 못 될까, 눈물을 글썽이며 잠 못 이룬다. 




나는 기자 비자를 발급받아 미국에서 일하며 머물고 있다. 매일 출근하는 정규직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바꿨다. 큰 언론사의 특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프리랜서 기자로 생활력을 인정받고 비자를 발급받는 과정은 가장 힘들었다. 미국대사관에서는 나에게 기자 비자를 내어 주기 전, 지난 5년간의 근무이력과 연봉, 세금납부상태, 현 직장 대표와의 통화 등 나에 대해 아주 꼼꼼하게 체크했다. 직장을 바꾸고 비자를 발급받는 과정은 1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나는 비자를 취득하고, 미국에서 애런과의 연애를 이어갔다. 애런과 결혼을 먼저하고 미국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냐는 주변의 조언도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도 애런과의 결혼에 확신이 없었다.


내가 결혼 대신 비자 취득에 노력한 다른 큰 이유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미국에서도 내 능력으로 일을 하며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고 싶었다. 애런의 가족을 처음 만나는 날, 애런과 나는 당당하게 나를 소개했고 나는 무척, 무척이나 우리의 사랑이 떳떳했다.


사랑 때문에 미국에 왔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애런을 사랑하지만, 사랑 하나 보고 미국까지 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애런도 놓치고 싶지 않았으며, 미국에서도 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왔다고 말했다.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1년간, 아주 꿀 같은 시간이 흘렀다. 그 후 4년 동안 나와 애런은 함께 ‘살아 냈다’. 애런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우리는 함께 미국땅을 가로질러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으로 왔다. 짐 몇 개만 덜렁, 아무런 가구와 생활품이 없었던 아파트는 당시 날씨만큼이나 휑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전화통화로 구두 계약이 가능해 들어간 그 아파트에는 바퀴벌레 천국이었다. 나는 바퀴벌레 때문에 우울증과 공포증이 왔고, 우리는 6개월 계약기간이 끝나고 바로 집을 옮겼다.


프리랜서인 내 수입은 안정적이지 않았고, 애런도 원하는 직장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일을 놓지 않으면서 미국에 적응하는데 온 힘을 다 했고, 애런은 그런 나를 챙기며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는데 애를 썼다. 

우리는 울다 웃으며 보드게임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커피를 함께 마셨다. 우리집에는 침대가 생기고, 소파가 생기고, 예쁜 조명이 생겼다. 그리고 평범했던 어느날, 애런이 침대에 앉아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당신 없이는 이제 살 수 없어요. 나와 결혼해 주겠어요?


여전히 내 마음은 똑같았다. 결혼을 하나 안 하나 우리의 관계가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나에게 있어 결혼은 관계의 완성도 뭣도 아니었으며, 아주 크고 중요한 ‘서류 작업’과 이음동의어 같은 거였다. 


서류작업이 시작됐다. 국제결혼이고 또한 영주권 신청 때문에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나중에 하기로 한 결혼식 대신 작은 언약식을 기념 삼아 하기로 했다. 법원에 언약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날은 내가 갖고 있던 옷들 중 가장 하얀 원피스를 골랐다. 애런도 하얀 와이셔츠를 입었다. 우리 앞에 언약식을 기다리고 있는 몇 커플이 있었다. 저 안에서 뭘 하고 나오는지 커플들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다. 애런도 나도 정보가 거의 없었다. 몇 가지 선서를 하겠거니 했다. 기분이 이상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애런이 말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결혼식도 아닌걸 뭐.


우리 이름을 부른다. 주례를 맡는 사람이 법원의 판사인지, 서기관인지 그랬다. 하얀 공간이다. 


“우리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주례자가 말을 뱉자마자, 내 심장은 터질 듯 뛰었고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당신은 애런을 합법적인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까?”


“네.”


나는 눈물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부자일 때나 가난할 때나, 좋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영화에서 보고 친구의 결혼식에서 들었던 익숙한 그 말들을 영어로 떠듬떠듬, 애런의 손을 잡고 눈을 보며 맹세했다. 내 눈물은 그 모든 맹세들이 끝난 뒤 키스를 하고 서로를 안아 줄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3분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 순간 나는, 서로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무거운 책임감을 온전히 느꼈다. 마치 내 감정이 아닌 것 같은, 결혼을 맹세했던 태고적부터의 사념들이 나를 타고 흐르는 듯 강렬한 감정이었다. 


뭣도 아니라던 결혼은 그렇게 우리 관계의 귀중한 전환점이 됐다. ‘우리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해,’ 애런의 가족이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애런에게 장인어른, 처제, 처남. 바뀌는 호칭들을 알려주는 기분도 묘했다. 애런이 아빠에게 ‘장인어른!’이라고 처음 부른 날 뭉클했던 감정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나와 애런은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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