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미가 정말 동치미 맛이 나서 놀라운 동치미
미국에서도 김장을 한다. 아니, 미국에 살면서부터 김장을 하고 있다. 사 먹는 김치는 비싸고, 어떨 때는 맛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는 배추김치 말고도 갓김치, 총각김치, 그리고 동치미를 담가보았다. 나머지 김치들은 양념들이 비슷비슷한데, 동치미는 절이는 방법과 만드는 방법이 생소해서 신경이 꽤 쓰였다. 동치미를 담그면서도 반신반의했더랬다. 이렇게만 하면 그 맛이 난단 말이야? 요리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양념이 적게 들어가는 말간 음식일수록 맛을 내기가 어렵다.
처음으로 담근 동치미를 냉장고에 넣고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3일 뒤 꺼내 맛을 살짝 본 후, 소금과 멸치액젓을 좀 더 넣었다. 1주일 뒤에 꺼내서도 소금과 멸치액젓을 추가했다. 맛이 없는데…. 속으로는 사실상 실패 확정이다.
갓 담근 배추김치, 갓김치, 총각김치의 신선한 맛에 감탄하며 두어 달이 흘렀다. 냉장고 구석에 있는 말간 동치미. 냉장고 문을 열어 놓은 채 동치미를 노려보았다. 상했으면 버려야 하니까 슬쩍 한 번 맛을 봐?
동치미를 꺼냈다. 뚜껑을 열었더니, 시큼한 향이 확 올라온다. 익숙한 동치미 냄새에 일단 안심을 한다. 발효가 되는 중인지 톡톡 터지는 기포들이 보인다. 국물의 맛을 본다. 아니 정말 그 맛이다. 슴슴하면서도 시원하고, 톡 쏘는 탄산의 느낌까지, 정말 동치미 맛이다! 내가 만든 동치미가 정말 동치미 맛이 놀랍다. 어깨가 쭉 펴지고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요리에서 오는 성취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내 자존감의 반절은 요리에서 쌓인 작은 성취감들일 것이다.
동치미의 맛이 어쩐지 동치미냉면을 열망케 한다. 이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냉면육수를 조금 가미하고, 냉면을 삶아 넣으면 완벽하겠다. 동치미냉면을 떠올리니 환상궁합인 양념돼지갈비가 생각난다. 처음으로 만든 동치미의 가장 완벽한 순간을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먼저 냉면사리와 육수를 공수해야 한다. 한국마트에 가지 않으면 좀체 볼 수 없는 식재료인데, 최근에 발견한 국제마트에서 냉면사리와 냉면육수를 운 좋게 샀다. 돼지고기는 지방에 살짝 섞은 부위로다가 평소에 가는 일반 마트에서 구매했다. 동치미냉면을 만들기 이틀 전에 달콤하고 짭짜름한 간장양념을 만들어 고기를 재워두었다.
이틀 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먼저 냉면을 삶고 차가운 물에 박박 씻어 큰 그릇에 소담하게 담은 후, 냉면육수를 부어주었다. 이제 재워둔 양념돼지갈비를 참기름에 굽는다. 참기름은 타기 쉽지만, 온도를 잘 조절하고 자주 뒤집어주면 양념돼지갈비에 고소함을 더한다. 잘 구워진 고기를 먹기 좋게 썰어서 접시에 담는다.
대망의 동치미를 꺼낸다. 여전히 좋은 동치미 냄새. 동치미 국물을 냉면 그릇에 넉넉하게 담는다. 동치미를 담글 때, 무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었는데, 제일 예쁜 무 하나는 통으로 넣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동치미 로망이라고나 할까. 그 예쁜 통 무를 꺼내어 최대한 얇게 썬다. 쌈무처럼 고기와 냉면을 싸 먹을 심산이다. 동그랗게 썬 무로 냉면 위를 장식하고, 정갈하게 썬 무청도 한편에 올린다. 막 구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갈비를 몇 점 올리고 통깨를 솔솔 뿌려 마무리한다. 어쩜 이리도 먹음직스러울까.
오늘은 마침, 전날 함박눈이 내려 온통 하얀 눈 세상. 아름다운 한겨울 풍경이 꽉 찬 창문 앞으로 동치미를 서둘러 가져간다.
양념돼지갈비 한 점을 입에 물고 냉면을 후루룩, 동치미 국물까지 호록, 짜릿하다! 달콤짭짜름한 고기와 탱글탱글한 냉면, 그리고 톡 쏘면서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동치미국물까지! 창문에 걸린 한겨울 풍경도 한 젓가락 걸쳐 냉면과 후루루루룩. 동치미냉면이 겨울과 이토록 잘 어울리는 음식이었구나. 미국의 한겨울 풍경 속에서 정성들여 만든 한국의 전통음식을 먹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다. 뿌듯하면서도 그립고, 또 놀라운.
상상했던 대로, 냉면에 고기를 올리고 얇게 썬 무로 감싸서 한입에 넣었다. 아삭하고 쫄깃하고, 다채로운 식감마저 한겨울 축제다. 한참을 먹다가 드는 생각, 그러고 보니, 내 인생 최초의 동치미냉면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