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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심 Aug 18. 2021

불가능, 사유의 시작

자크 데리다, 《용서하다》

자크 데리다의 글을 처음 접했다. 그의 이름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데리다’를 검색해 봤다. 그는 현대 철학에 해체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다. 해체는 탈구축(deconstruction)이라고도 불리고, 텍스트와 의미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기호학적 분석방법이다. 바꿔 말하면, 이미 구축된 개념을 다시, 달리, 새롭게 생각해보는 관점이다. 데리다의 《용서하다》는 1997년 ‘위증과 용서’라는 세미나의 강의를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그는 용서(Pardon)라는 단어를 말하며 강의를 시작하고 아직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덧붙인다. 이 책은 용서에 관한 담론으로 용서의 의미와 본질 그리고 용서의 존재 이유 등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어도 그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저 용서(Pardon)라는 단어의 질문의 조각만 흩어져 있을 뿐이다.     


우리의 관념에서 용서는 속죄, 평안, 구원, 화해와 결부하곤 한다(p.24). 용서의 장면을 떠올려 보면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 죄를 자백하고, 속죄하며 용서를 구한다. 즉, 전통적인 ‘용서’의 개념은 용서를 구해야 하고,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모두 용서를 구하지는 않는다. 또한 진심으로 죄를 뉘우친 게 아니라 다른 목적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대상은 용서를 꼭 해줘야 하는가.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일도 있지 않을까. 범죄가 너무 무겁고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범죄라면 인간의 척도에서 용서하기는 어렵다.   

   

용서는 때로는 일상적으로 가볍게, 때로는 진중하고 사려 깊게 모든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데리다는 용서가 ‘의미’를 획득하려면 용서 불가능한 일을 용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p.34)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반인류적인 범죄가 있었다. 이러한 범죄는 시효가 없고, 회복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우리가 절대 망각해서도 안 되는 사건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시효가 없고,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절대 용서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용서의 본질은 바로 시간, 과거에 대한 반박 불가능성과 수정 불가능성을 내포한 시간의 존재(p.41)이다. 또한, 용서가 끝나는 것으로 보이는 곳, 불가능해 보이는 곳, 바로 용서의 역사와 용서의 역사로서의 역사가 마지막에 다다른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용서가 시작(p.35)되어야 역설한다. 즉, 용서가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용서 불가능, 곧 속죄할 수 없는 어떤 인간성의 ‘기준 없는’ 기준, 근본 악의 괴물성과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p.48).  

   

모든 것을 포함하고 언어적 표현과 함께 일어나는 다른 모든 상황을 제외하지 말고, 말로 표현된 것-너머의 용서 가능성, 나아가 인간적인 것이 아닌 용서 가능성과 그 필연성을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p.87).     


좋은 질문은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킨다. 데리다의 질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용서’를 낯설게 한다. 용서의 전제가 잘못을 고백하고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는 필요성이 있다면 용서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계산적인 논리이지 않을까요?(p.81)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대일로 이루어진다면 가족, 공동체, 민족 등 집단적으로 용서를 비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인가요?(p.83) 용서는 반드시 정해진 어떤 단어-동사를 통해서 말해져야 할까요? 용서에는 침묵의 요소는 없는 것인지 그리고 용서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의 경험을 받을 수 없는 것인가요? (p.85). 가능성과 불가능성은 이분법적이지 않다. 불가능성은 확정된 게 아니라 불-가능성으로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제 가는 올 수 있는 가능성이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용서 불가능의 불(不)에 대한 사유를 해 보자고 한다. 또한, 아포리아(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는 남겨두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토론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용서’라는 단어와 맞닥트린다. 타인을 용서해야 하기도,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하기도 하다. 어떤 경우는 용서 불가능한 지점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용서의 필연성은 알고 있지만 용서 가능으로 바뀌는 건 어려운 문제이다. 데리다가 말한 용서 불-가능성은 용서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 용서해야 한다는 단언은 아니다. 지금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면, 용서할 수 없는 마음에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용서할 수 없음이 용서를 안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용서는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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