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심 Aug 25. 2021

기억하자, 체르노빌

히로세 다카시, 《체르노빌의 아이들》

사고는 한순간이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30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다. 안드레이는 원자력 발전소의 총괄 담당자이다. 그는 매사에 신중했고, 모든 지시에 만전을 기하며 발전소에 안전을 보증했다. 하지만 그날 밤 그가 했던 모든 노력이 부정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라는 자부심을 깡그리 무너뜨렸다. 이 사고는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과 방사능 피폭의 심각성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작가 히로세 다카시는 1인 대안언론이라 불리며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는 저널리스트 겸 논픽션 작가이다. 그는 일찍이 원자력발전소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되고, 사람들에게 그 위험성을 알렸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소와 거리가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가 자신과는 무관한 이야기처럼 들렸고,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그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원전사고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피난민 중에 방사선 피폭으로 팔 개월 된 아기가 먼저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 불행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갗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과 현기증에 시달렸다. 또한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거나 몸의 특정 부위에서 피가 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p.88~89). 안드레이는 사고 수습을 위해 발전소로 돌아가고, 아내에게 아이들을 부탁한다. 

     

이반은 아까와는 다르게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행동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받아들이도록 침착하게 마음을 다독이면서, 시력이 회복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얼른 생각해 놓아야겠다고 판단했다.(중략) 타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역시나 이반의 손은 허공을 헤맬 뿐이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엄마, 괜찮아요.(중략) 걱정 마세요. 제가 잘해 낼게요"(p.79~84).     


이네사가 불안해하는 오빠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소녀는 자신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태였지만, 엄마에게 오빠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듣곤 자기가 오빠를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마주 잡은 오누이의 손에서 흥건히 땀이 배어 나왔다(p.91).     

이반과 이네사는 위기상황에서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열다섯 살 이반은 사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다. 그는 원전 폭발 직전까지 내일 아침에 좋아하는 소녀에게 고백을 할지 말지를 고민하던 감수성 많은 소년이다. 열 살 이네사는 비록 몸은 약하지만 총명한 아이로 상황 판단이 빠른 아이다. 그들은 극한 상황에서 침착성을 잃지 않고 의젓했다. 사고는 그들을 더 이상 아이로 남을 수 없게 했다. 아이들은 살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책임지는 어른이 되었다.     


원전 폭발로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중에 아이들은 세상과 격리되었다. 부모가 없는 곳에서 아무도 지켜봐 주지 않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아이들의 시신이 어디로 운반되었는지, 사망자수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아이들은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1992년 조사에 따르면 방사능 피폭 피해자는 150만 명으로 추정되고, 그중 어린이 숫자가 35만 명이라고 한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인류 최악의 인재다. 어른들의 논리에 의해 아이들이 희생되었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사고 가능성이 낮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원전 폭발은 교통사고나 자연재해보다는 발생 가능성은 낮지만 사고가 발생했을 때 파급력이 매우 크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피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2011년 후쿠시마에서도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보다는 내 일상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더 크게 보인다. 원자력 발전소의 가동 여부를 또는 건설 여부를 고민할 때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보았으면 한다.    

 

우리는 지구에 함께 살고 있지만 각자의 세계에 존재한다. 타냐는 언니 부부가 살고 있는 키예프에서 아이들의 행방을 찾지만 언니 부부는 타냐의 심정을 공감하지 못한다. 언니 부부는 아이가 없었고, 타나에게 던진 위로는 너무나 막연한 긍정이다. 아이들이 당국에서 치료받고 있을 거고, 곧 돌아올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타냐는 깨닫는다. 누군가의 고통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과민 반응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공감은 나의 세계에서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렵고 힘들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느끼는 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에 대해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나라, 다른 지역의 이야기이고 내 일상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겼다. “난 절대 잊지 않겠어. 모든 것을 다 기억할 거야”(p.73).  소설 속에서 이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체르노빌을.          

매거진의 이전글 불가능, 사유의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