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본사를 둔 우리 회사는 3월부터 전사적으로 재택근무를 시행했다. 덕분에 이제 집에서 일한 지 3개월 정도 되어가는데, 순진한 사람들은 "아 집에서 일하니 사내 정치 같은 더러운 꼴 안 봐도 돼서 참 좋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천만의 말씀. 인간은 둘 이상만 모이면 정치를 해대기 시작하는 이상한 동물이 아니던가. 정치가 당신의 눈에 안 보이는 것뿐, 다른 형태로 옮겨간 것일 뿐, 없어진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많은 회사들이 재택근무, 원거리 근무 (Remote Working) 등을 장려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시대가 되었다. 이 사태가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여태까지 직장에서의 성공을 보장했던 각종 처세술도 위기에 놓였고 변화되는 조짐을 보인다. 당신에게 있어 처세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복도나 탕비실에서 마주친 직장 상사와의 잡담 및 정보 공유라던지, 중요한 유관부서 팀장이 야근했을 때 조용히 그의 책상에 놓고 가는 커피라던지, 얼굴을 들이대며 하는 회유 / 협박 / 간청이라던지, 많은 사람들을 회의실에 모아놓고 강약을 조절해가며 화이트보드에 멋지게 그리는 아웃라인이라던지. 이제 다 바뀌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사실 나도 뾰족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본 새로운 오피스 처세술의 형태에 대해서 몇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01. 나쁜 소식을 계속해서 전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의 근거 있는 당당함과 자신감
코로나 시국에 잘 나가는 회사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통제가 가능하지 않은 외부 상황 속에서 부진한 사업 실적을 겪고 있는데, 그렇다고 예측하고 통제하고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안 좋은 소식을 리더십에 전해야 할 때가 많은데, 이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해내는가가 매우 중요해졌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 압박을 아예 무시해버리는 방법, 좋은 뉴스를 먼저 전하고 나쁜 뉴스를 전했다가 본전도 못 찾는 방법 등 참 다양한 방법을 관찰하기도, 직접 해보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을 써야 하고 회사 문화마다 보고를 하는 방법이 참 다른데, 내가 현재 속한 글로벌 조직에서 결국 가장 잘 통하는 방법은 아주 솔직해지는 것이다.
"저는 새로운 팬데믹 상황에서 팀의 방향을 X, Y Z로 정했습니다. 이 새로운 상황 때문에 우리 팀은 기존 목표로 설정했던 A, B, C를 완전히 "deprioritize" (우선순위에서 완전 밀림) 했고 여기에 최소한의 시간만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팀의 방향에 따라 일한 결과 D, E, F의 성과를 냈습니다 (성과는 최대한 수치화하는 것이 좋다). 분야 G에서 우리는 큰 발전을 했지만 80%의 파트너들이 다음 분기가 불확실하다고 말합니다. 반면, 아직까지 분야 H에서는 많이 못하고 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즈니스 라인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뿐만 아니라 무엇을 의도적으로 안 하고 있는지를 공론화하는 것이고, 2)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을 꼭 이야기하되 상황이 불확실함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것, 그리고 3) 못하고 있는 것은 인정하고 그에 대한 계획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재택근무 시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이고 특히나 안 좋은 비즈니스 상황을 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이다.
02. 유관부서 협업 이끌어내기: 갈 곳 없는 깊은 빡침의 늪에서 벗어나기
짜증 나는 유관부서 한 두 개 정도 없다면 당신은 진정한 직장인일 수가 없다. 사실 유관부서 갈등은 균형 잡힌 조직을 위한 메커니즘이라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불가능한 손익 분기점 넘겨오라는 파이낸스팀 팀장, 프로덕트 리포팅 개선은 자기 업무 영역이 아니라는 엔지니어, 내 팀원을 이상하게 괴롭히는 데이터사이언스 팀, 모두 평상시에는 미팅 중에 박 터지게 싸우다가도 복도나 사내 카페에서 마주치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부딪히거나, 화장실 가는 길에 만나면서 좋게 좋게 넘어가자며 잡담을 하거나 서로의 상황에 대해 하소연하며 매끄럽게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더 이상 후자의 프로세스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고 전자의 박 터지게 싸우는 것만 원격으로 하고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게 된다. 깊은 빡침이 풀리지 않고 구질구질하게 남으면서 사이가 안 좋은 유관부서들은 더 멀어지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은 없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팀에서 새롭게 시작한 프로세스를 소개한다. 부서의 목표를 모든 유관부서에 명확히 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교육" 시키기 위해 2주에 한 번씩 모든 유관 부서 팀장 및 팀원들에게 뉴스레터를 보내기 시작했다. 2주간 우리가 이번 분기에 목표로 한 프로젝트들은 얼마나 진행이 되었는지, 어떤 부서들의 도움을 받아 무슨 일들을 했는지 (정확한 사람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좋다. 띄워주어야 할 사람은 띄워주자), 또 향후 2주 동안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에 대해 최대한 군더더기 없이 간략하게 보내는 진행 보고서 형태이다. 갈등이 생겼을 때에는 상대방과 일대일로 해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다.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오해 아닌 오해가 상당히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람과 일대일로 해결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상사나 주위 사람들에게 먼저 가면 이메일이나 쪽지가 뒤로 전해지면서 반드시 탈이 난다는 것을 힘들게 깨달았다. 또한 유관 부서와 "글"로서 생긴 오해는 "글"로 풀지 말고 만드시 "말"로 푸는 것이다. 시간이 없더라도 이메일 전투가 오고 간 뒤에는 반드시 화상 회의를 잡아서 분명하게 이야기할 것은 하고 오해는 푼다.
03. 가상회의 진행의 새로운 기술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원격 회의의 빈도는 늘어났지만 반면에 현저하게 떨어진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회의 중의 리액션과 질문이다. 회의를 리드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답답하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모르겠고, 평소에 시끄럽고 별 도움도 안 되었던 인간들은 남들이 조용한 이 틈을 타 더 시끄럽고 당연 더 도움이 안 된다. 결국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해서 회의의 목표에 집중하고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관건이다.
3개월간 정말 많은 회의를 VC로 진행하면서 나름 노하우가 생겼는데 일단 회의를 시작할 때에 앞으로 30분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자 지금부터 30분 동안 우리는 이 프로덕트를 어떻게 런칭할지 관련해서 A, B, C, 의사 결정을 해야 해. 이와 관련해서 수요예측팀과 데이터팀에게 관련 사항을 미리 조사해오라고 시켰어. 시간이 30분밖에 없어서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시간 관리를 할 거니까 좀 예의 없어 보이더라도 미리 양해를 구할게. Andrea, 너는 수익률 관점에서 의견을 내줬으면 좋겠고, Michael, 너는 마케팅 관점에서 의견을 내줬으면 좋겠어." 잔 가지를 최대한 줄여서 미팅 시작 전에 각자의 역할이 무엇이고 진행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 효과가 좋다. 큰 규모의 회의에서 Yes / No 의견을 받아야 하는데 의견 수렴이 힘들 때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자, 시간이 없어. 번거롭겠지만 다들 영상을 켜줘. 찬성은 엄지손가락을 위로, 반대는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3분 정도 시간을 줄게".
큰 규모 미팅에서 사람들의 반응과 리액션을 모두 함께 보고 싶을 때에는 다양한 플랫폼의 도움을 받아도 좋다. 업무 관련 퀴즈를 내서 참여도를 높일 수 있는 Kahoot, 또는 업무 관련 키워드를 입력하게 해서 참여도와 흥미를 높일 수 있는 Mentimeter 등 매우 쉽게 쓸 수 있는 좋은 무료 플랫폼이 많다.
(좌) Kahoot (우) Mentimeter
04. 내 이름을 널리 알리거라
아무리 성과 중심의 미국 테크 기업이라 할지라도,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를 포장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가끔 참 거지 같은 경우에는 포장이 더 중요할 때도 많다. 재택근무 이후로 참 이상하고 재미있는 자기 PR의 시대가 열렸다. 사내 게시판에 글을 도배하는 인간, 이메일을 갑자기 너무 자주 보내는 인간, 가상 회의 때 자기 목소리 듣는 게 취미인 것 같은 인간, 일보다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프레임워크만 잔뜩 만들어대는 인간 등 참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택근무 이후 인트라넷, 이메일 등의 글로 써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자연스럽게 폭증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조직 및 구성원들의 피로도 또한 폭증했다. 그렇기 때문에 [질]보다 [양]보다 승부하는 자기 PR은 아주 위험해진다. 점차 "아 저 팀은 (혹은 저 사람은) 매일 별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공지하는 팀 (혹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금방 생기기 때문이다. 자기 PR을 재택근무 시대에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PR 전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성과를 뽐낼 때 단순 자랑이 아닌 이 성과가 왜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이 성과를 내면서 어떤 것들을 배웠는지, 읽는 사람 입장에서 내가 이미 했기 때문에 당신은 하지 않아도 될 실수가 무엇인지, 등 최대한 유익하면 된다. 또한 내가 낸 성과에 대한 PR을 하기 전에, 이 PR을 스폰서해 줄 사람들을 미리 찾아 협의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스폰서는 굳이 내 부서의 윗사람일 필요는 없다. 유관 부서 동료, 옆 부서 팀장 등 내가 이룬 성과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된다. 스폰서의 역할을 나의 영향을 증폭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팀 사람들에게 "마케팅팀 OO님이 리드해서 린청한 프로젝트 X에 대한 링크 보내드리니 모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 Y에 도움이 될 내용이 많은데 다음 부서 회의 때 OO님을 초대하고 싶으니 의견 알려주세요"라고 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네트워킹 또한 재택근무 시대라고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내가 직접 느끼는 것이지만, 평소에도 네트워킹이 소극적이었던 사람들은 재택근무 3개월째가 되니 이름도 생각 안 나고 과연 아직도 회사에 다니는 것인가 궁금해서 이름을 인트라넷에 쳐보기도 한다. 그만큼 정말 빨리 잊혀진다. 나의 경우 의도적으로 한 달에 3명 정도 내 업무나 커리어에 있어 중요한 사람들과 화상 회의를 잡는다. 별다른 안건이 없어도 된다. "너무 오랜만이라 얼굴 한 번 보려고 연락드렸어요" 정도의 캐치업만 해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05. 팀 리더로서 보여야 할 자세
가끔 주위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왜 재택근무하는데 넌 더 바쁘고 야근이 많냐?"라는 질문을 한다. 팀원으로서는 일일 줄었을 수 있지만 팀장으로서는 일이 더 많아지는 시기다. 회사에 물리적으로 있을 때에는, 최악의 경우 옆에서 닦달 및 압박을 해서라도 일을 진행시키는데, 모두 집에서 근무할 때는 사실상 이런 방법들이 불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목표 설정과 목표 위주의 보고 방식으로 팀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또한 전반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많아진다. 대외적인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이에 대응하는 회사 지침이나 방식을 대변해야 할 일도 점차 많아지고, 힘든 상황 속 팀원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일 또한 더욱더 중요해진다. 그러다 보니 팀장 입장에서는 일이 엄청나게 많아진다.
코로나 시대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라기 때문에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다. 전 세계가 힘든 시기이다. 좋은 소식보다는 안 좋은 소식, 확실한 뉴스보다는 불확실한 뉴스를 전해야 할 때가 많다. 이럴 때 팀원들에게 "다 괜찮아질 거니 나만 믿어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허황된 사실이고 "와 그냥 다 망했고 나도 힘들어 얘들아"라는 말도 참 책임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리더로서 더욱 강조되는 것이 [Vulnerability]이다. 한국말로 번역이 절대로 안 되는 단어 중 하나인데, 사전적으로는 [상처/비난받기 쉬움, 약점이 있음, 취약성]으로 이상하게 번역된다. Vulnerability를 보이는 리더십이란, 좀 심플하게 번역하자면, 인간미 / 갬성을 보임으로써 더욱더 효과적인 리더십을 말한다.
나도 아직 잘은 못했지만 실생활에서 적용을 해보고자 많은 노력 중이다. 팀원들에게 회사의 힘든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회사에서 이런 정보를 기반으로 이렇게 결정을 했어. 이 결정은 앞으로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에 [이렇게 저렇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해. 물론 아주 힘든 결정이었을 거야. 너희 중에는 이 결정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 이 상황에서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들은 A, B, C 뿐이니까 거기에 모두 집중을 해주는 리더십을 보여줬으면 좋겠어. 내가 이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힘은 없지만 이 결정에 대해 수긍하기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있으니 언제든 얘기해줘". 힘든 소식을 전할 때마다 이런 구조로 최대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려고 하고 팀원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도 역병은 처음이라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사태가 2021년까지 갈 것이라고 믿고, 많은 글로벌 회사들이 재택근무를 연장할 것으로 보인다. 이 사태가 종료되더라도 재택근무가 보편화될 가능성이 높다. 즉, 새로운 오피스 처세술이 나타나서 보편화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정치를 알지 못하는 당신이나 정치는 통달했다고 생각하는 당신이나 우리 모두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처지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