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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min Dec 09. 2017

예진실에서의 이야기

실습 일기

시험문제를 풀다 보면, '이 많은 내용을 환자와의 문진에서 얻었다고?'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걸 직접 하기 전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몰랐다. 몇 분 정도의 짧은 진료시간 바쁜 교수님을 대신하여 초진환자에게 여러 질문을 하는 일정이 실습에 포함되어 있고, 병원에서는 이를 예진이라고 부른다. 한 환자당 10분 이내의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써 볼 계획이다.


예진실에서의 원칙 중 하나, 환자와 예진의 단 둘만 있어야 한다. 예진의는 민감한 질문들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환자에게서 민감한 질문에 대한 거짓 없는, 솔직한 답을 받아야 정확한 진단이 이루어질 수 있다. '민감한 질문'의 예이다.


정신과 : 자살 시도를 해 본 적이 있거나,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산부인과 : 지금까지 성경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산부인과 : 자녀분이 몇 분인가요? 그렇다면 임신도 _번 해 보신 것이 맞으신가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민감한 질문이라는 데에 다른 의견이 없어 보인다. 세 번째 질문이 조금 의문이 될 수도 있는데, 자녀의 명수를 먼저 물어보고 임신 횟수를 물어보는 것을 통해 유산 횟수를 역으로 추론할 수 있어 민감한 질문이다. 지금까지 유산, 사산 횟수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보다, 자녀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의 생년을 통해 쌍둥이인지 파악한 후, 임신 횟수를 물어보아 유산, 사산 사실이 있는지, 횟수가 몇 번인지 물어보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환자-의사 관계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어차피 유산과 관련된 질문이 환자-의사 관계를 해친다면, 질문의 순서를 바꾸는 것을 통해 환자-의사 관계를 덜 해칠 수 있다.


예진실에서의 환자-의사 관계를 좋아지게 하는 팁을 레지던트 선생님들께 꽤 받을 수 있다. 자살을 시도한 후 응급 입원하게 된 환자에게 '지금 입원을 하시는 게 매우 기분이 안 좋으신 상황이시지만...'라는 말로 환자와의 관계를 나쁘지 않게 할 수 있다. 예진에서 사용할 수 없는 예긴 하지만, 얼마든지 다른 환자들에게도 바꾸어 적용할 수 있다. 산과에서의 유명한 예진 팁 중 하나는 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마지막에 하는 것이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예진이 조금 가혹했다.


초진 환자들은 대학병원이 처음인 경우가 많다. 그들이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여러 경로를 거친 후 '의사 비슷한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경험은 처음이다. 자신의 증상에 대해 전문가에게 말하고 싶어 하고, 그에 따른 공감과 해결방법을 말해주길 원하며, 많은 시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 자신에게 시간을 소비해줄 것을 원한다. 물론 예진실에 들어가기 전, 간호사 선생님께서 잠깐 예진을 본 뒤 본 진료를 받는다고 하였지만, 아마, '잠깐'은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예진에서 필요한 토막 정보를 원하는 학생 의사와 예진에서 진단과 치료를 모두 원하는 환자와의 대화는 여러모로 어색해진다.


예진을 꽤 해 본 결과,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뭔가 많이 말하거나, 치료법을 요구한 환자에게는 '치료나 처방 관련해서는 나가신 뒤 교수님과 상담하시면 됩니다. 저와는 간단한 문진을 통해 예진을 보시는 겁니다.'라고 명시해 주는 노하우를 얻게 되었다.


병원은 학생에게 10분, 환자가 많을 때는 5분 정도의 짧은 시간으로 마무리를 기대한다. 학생이 예진을 그동안 얼마나 많이 보아 왔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예진을 충분히 빨리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밀렸다고 클레임이 들어오기도 하고, 너무 빨리 보려고 하면 예진의 정확도가 낮다고 교수님과 학생담당 선생님께 연락이 온다. 나 같은 경우에는 예진이 너무 많이 밀리지 않는다면 교수님과 학생담당 선생님이 화나지 않는 선에서 충고를 듣기 때문에, 조금 밀리더라고 정확하게 하려고 했다. 시간이 조금 늦더라도 정확한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진의 경험을 토대로 모의 환자 시험에서 긴장을 적게 할 수 있었다. 예진하는 동안 마치 학생 의사가 아니라 의사인 척하느라 곤욕스러울 때도 있었고, 타자를 치느라 너무 바빠서 환자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본 경험도 있었지만 재밌는 경험이었다. 


가장 기억이 남는 경험으로 끝내려고 한다. 예진 환자가 너무 많이 밀려 환자의 얼굴을 볼 틈도 없이 바빴던 어느 날, 여자 환자분께서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손이 정말 예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예쁘신가요?" 예진이 밀려 있어 힘들었고, 환자분들 한 분 한 분께 많이 신경을 못 써 드려서 죄송할 때 뜻하지 못한 칭찬을 받아서 감사하기도 했고, 죄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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