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꼭그래 Sep 21. 2019

[영화] 알라딘

이슬람 예술 islam art

영화 알라딘으로 만나는 이슬람 예술


영화 알라딘은 그리 복잡한 내용이 아니다. 이슬람 문화권 어딘가에 존재하는 “아그리바”라는, 아랍이라는 말을 늘인 것이기도 하고 아랍 문명이 자리한 어느 강가를 의미하는 언어유희적인 말 같은, 가상의 왕국에서 좀도둑 알라딘이 재스민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는 성공담이다. 정신과 육체 혹은 신분적 결함이 있지만 고결함으로 삶을 구축해 낸다는 이야기에 유쾌함과 예쁜 것들을 더해 만든 영화다. 그래서 이 글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보다는 예쁜 것들로 등장하는 이슬람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정확히는 영화의 아트디렉터가 시각효과를 위해서 이슬람 예술의 어떤 점을 참고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고백하자면 이슬람 문화와 예술에 관해서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은 이슬람 예술에 관해서 알아보려는 시도이자 무지와 편견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슬람 사상사나 종교사와는 다르게 이슬람 예술을 모르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의 관습적 학습법과는 다르게 이슬람 문화권은 특정한 국가나 지역, 민족으로 좁혀 말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와 닿지 않는 이슬람 문화권을 건축물로 대입해 생각해보면, 유럽 서남쪽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한 이베리아 반도 알 함브라 궁전부터 시작해서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를 지나 무굴 제국의 유산인 타지마할 궁전으로 유명한 북인도를 거쳐 중국의 북서쪽 신장위구르를 지나서 별과 달의 궁전 우즈베키스탄의 쉬토라이 모히하사(Sitora-iMokhi Khoxa) 거쳐 카자흐스탄 탈디코르간의 모스크까지 광활하게 펼쳐진 문화권이다. 이슬람 문화권은 너무 광범위해서 작게 말해지지 않는다. 너무 크게 말해져야 해서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슬람을 작게 말해지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로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 글에서도 이슬람 예술을 작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두 작게 말해질 수도 없으며 그럴 수 있다 해도 이슬람 예술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동시대성이 확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은 아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다른 지역은 유럽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어떤 곳은 동서양의 영향 없이 이슬람만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동시대이면서 서로 다른 특징을 갖는 것이 이슬람 문화권의 예술이다. 이슬람 예술은 아랍인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유대인과 서양인, 그리고 아시아인들에게 까지 향유되고 제작됐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과 같은 양식사(樣式史)로 말해지지도 않는다. 기교나 재료의 변화로 인해서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되기도 하지만 앞선 시대로의 회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회귀가 후대에 창조의 원동력이 되어 새로운 양식의 출현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래된 편견인 종교적인 기준으로도 이슬람 예술을 좁혀 말할 수도 없다. 종교적인 건축물에서는 엄격하게 율법(성경과 코란)과 마호메트의 말을 지키고자 하면서도 세속적인 생활 속에서는 미적 욕구를 억제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값비싼 보석들과 화려한 비단으로 몸을 치장해 부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익숙한 관습적 대답들로 이슬람 문화예술에 관한 정보를 가공하고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이슬람에 관한 지식은 빈약할 수밖에 없다. 빈약한 지식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편향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편향적인 시각은 다시 편견에 의한 정보만을 이끌어 내게 했다. 이슬람 문화예술에 관한 이런 악순환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지속된 일이기도 하지만 예외적인 것도 있다. 천 하루 동안의 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다. 아라비안 나이트 속의 아랍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고 아름다운 사랑을 찾아 헤매며 부와 명예를 갈구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이슬람을 바라보게 하는 알라딘의 이야기는 그들에 관한 이해의 가능성을 열려 준다. 영화 알라딘에 등장하는 궁전, 카펫, 램프와 지니를 통해서 이슬람 예술을 말하고자 한다. 부족한 지식에 관해서 양해를 구하고 싶다. 먼저 건축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슬람 왕조와도 결을 같이 하기에 시대 구분이 그나마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그리바와 궁전                                                  

예루살렘, 바위의 돔, 692년, 출처 위키백과


예루살렘 동쪽 작은 산을 성전산이라 부른다. 구약 속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이곳에서 신에게 바치려 하니 천사가 나타나 저지했다는 것을 기리기 위해 기원전 950년경 솔로몬 왕이 성전을 세웠다는 전설 때문이다. 하지만 바빌로니아가 침공해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기원전 515년경 페르시아에 의해 바빌로니아가 멸망하자 돌아온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건한다. 기원전 37년 헤롯왕이 유대인들에 대한 친화 정책으로 성전은 더 화려하게 재건된다. 서기 70년 로마제국의 폭정을 참지 못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티투스 장군에 의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전은 소실된다.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된 이곳에 이슬람 우마이야 5대 칼리프 압드 알 말릭에 의해 688년부터 692년까지 4년여의 공사 끝에 지금의 바위의 돔이 완공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슬람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황금으로 치장된(지금은 구리와 알루미늄) 돔이 화려하게 빛나는 이 이슬람 사원은 바위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메트가 632년 6월 8일, 이 바위에서 승천했으며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바위의 돔은 마호메트가 태어난 메카와 그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와 함께 이슬람 3대 성지 중 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유대인과 이슬람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리 넓지 않아서 실제로 이곳에서 종교의식이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의식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신분이 높은 몇 사람만이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도 장군 발자국이나 손자국이 남았다고 해서 장군바위라는 바위들이 있다. 이곳은 음식물을 가져와 신과 자연에게 바치는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추측된다. 넓고 평평하거나 바위 아래에서 소량의 물이 흘러나오는 바위를 향해 제물을 바치고 종교의식을 행했으며 의식이 끝나면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의식은 농경생활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에서, 예루살렘의 바위의 돔에 관한 이야기는 이곳 환경 여건에 따라 농경사회에서 목축사회로(한국은 목축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변하는 과정에 관한 토속적 일화들이라 생각된다.*


팔각형의 건물 위에 반구형의 돔을 올려져 있다. 건물 외부 벽면에는 이슬람 문화의 특징인 기하학적 문양의 타일을 붙여 있지만, 바위의 돔은 서양의 비잔틴 양식으로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사원임에도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나 무슬림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공사를 했다. 종교적 근원이 같다는 생각으로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이슬람은 외부 세계에 무척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영화 알라딘에서 재스민 공주의 궁전은 바위의 돔보다 더 앞서 세워진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537년에 완공된 터키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돔과 닮았다. 외형상으로는 그렇지만 알라딘이 살고 있는 아그리바의 건물들은 벽돌로 지어졌다. 흙벽돌로 건물이 세워지던 시대는 아바스(혹은 압바스) 왕조부터다. 예루살렘을 떠나 이제는 이라크 바그다드로 가야 할 차례다.  

  

이라크 바그다드 사마라, 나선형 미나레트, 출처 위키백과 


750년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린 아바스 왕조는 836년 수도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옮긴다. 아바스 왕조부터 진정한 이슬람 양식의 탄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슬람 왕국의 새로운 시작은 그리 쉽지 않았다. 당시 알 무르타심 칼리프는 투르크계 노예들을 사들여 군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는 공을 세워 칼리프의 신임이 두터웠다. 하지만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은 투르크계 군인들을 노예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다.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이들이 마주치지 말아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바그다드에서 시장과 모스크로 가려면 칼리프의 궁을 지나야 했다. 궁을 지키던 투르크계 군인들과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알 무르타심 칼리프는 마호메트의 후손들에게 술탄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투르크계 군인들을 바그다드에서 100여 킬로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가인 사마라로 이주하게 했다. 이후 술탄이라는 수많은 왕족이 아랍과 중앙아시아에서 탄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바그다드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 없었던 술탄들은 사람들이 궁을 지나쳐 투르크 군인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도시계획을 세운다. 시장과 모스크와 궁을 강가에 지어 원하는 곳으로만 갈 수 있도록 건물들을 배치했다. 이 도시계획을 빠르게 실현할 방법도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까지 석재로 모스크를 세웠다면 아바스 왕조는 강 유역의 풍부한 진흙을 이용해 벽돌을 만들어 건물들을 세웠다. 대표적인 건축물이 사마라의 나선형 미나레트와 모스크다. 나선형 미나레트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서양의 기독교인들은 사마라의 모스크(mosque)를 비하하는 의미로 모기(mosquito)라는 말을 만들기도 했으며 미나레트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사용되기도 한다. 아바스 왕조는 1258년 몽골군에 의해 바그다드가 함락되기까지 이슬람의 수도였다. 몽골에 의해 이슬람 왕국인 아바스 왕조가 패망하기는 했지만 아시아 문화와 결합해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인도 무굴 제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인도 타지마할 궁전, 1631 -1653, 출처 위키백과


타지마할 궁전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굴 제국 5대 왕인 샤 자한 왕이 출산을 하다 죽은 뭄타즈 마할 왕비를 기려 세웠다는 슬픈 사연이 있는가 하면 궁이 완공되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궁전을 짓지 못하도록 공사 관계자들의 양 손을 모두 잘라냈다는 잔혹한 이야기다. 타지마할 궁과 관련된 이야기가 어떻든 이 궁의 아름다움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페르시아, 투르크, 인도의 양식이 결합된 이 궁은 영화에 등장하는 궁에 관해서 중요한 참고가 된 것으로 보인다. 


*고전 PC게임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페르시아의 왕자라는 게임의 배경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우리의 상상을 확장해주고 상상의 영역들을 넘나들며 가능한 모든 것들을 보게 해 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 양탄자에 관한 이야기다. 


양탄자(carpet)


알라딘을 읽은 어린 독자라면 카펫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달빛을 받으며 구름보다 높이 올라 사막을 가로지르며, 별과 별 사이를 건너는 상상을 하게 한 카펫은 정신 속에서만 그렇게 작동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펫이 유럽에 도착하기까지는 실제로도 그래야 했다.    

한수 홀바인 대사들, 1533년, 출처 영국 내셔널 갤러리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은 장 드 댕트빌(1504 –1535년, 좌측)이라는 프랑스 대사와 조르주 드 셀브(1508 – 1541년, 우측)라는 교황청의 외교관과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장 드 댕트빌의 의뢰로 그려졌다. 지구본과 과학기구를 통해서 그들의 교양과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이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은 기구들 아래에 펼쳐져 있는 아랍의 카펫과 뒷 배경인 녹색 비단 커튼을 통해서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홀바인의 그림에 등장했다고 해서 홀바인 카펫이라 불리는 이 카펫과 비슷한 것이 베를린 이슬람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사들에 등장하는 카펫은 수출용으로 제작되었다. 이용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럽인들의 장식적 선호도에 따라 크기가 결정되었다. 한스 홀바인의 그림에 등장하는 카펫은 문양과 크기로 보아 접대용 카펫을 기본 모델로 삼아 장식적인 크기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홀바인 카펫, 15세기 말, 출처 베를린 이슬람 미술관


아랍인들은 커다란 바닥용 카펫을 깔고 용도에 따라 제작된 카펫을 그 위에 깔았다. 식사용 카펫을 깔면 식탁이 되고, 접대용 카펫은 차를 즐기는 다도용으로 사용됐다. 홀바인 카펫에는 기하학적인 아라베스크 무늬가 수 놓여 있다. 독실한 이슬람인이라면 생활도구나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것들에는 인간이나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슬람의 마지막 예언자 마호메트와 관련되어 있다. 짐승과 새의 형상으로 장식된 커튼을 단 아내 아이샤에게 마호메트는 신의 창조행위를 흉내 낸 사람은 신의 형벌을 받게 된다고 설득해 커튼을 내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화 알라딘의 카펫은 크기와 문양을 보면 기도용 카펫을 참고로 했을 것이다. 기도용 카펫 안에는 마호메트의 출생지인 동쪽 메카를 가리키는 상징하는 아치형 문양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또한 바위의 돔(Al-Aqsa Mosque)이나 나무나 잎사귀를 기하학적으로 변형시킨 문양과 코란의 구절이 수놓아져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종교적인 문양을 빼고 기하학적인 문양만을 남겨놓았다. 코란의 구절이 수놓아져야 할 가장자리도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채워져 있다. 지금도 레드카펫은 주요 행사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에서의 녹색 비단 커튼을 보면 모스크의 문양을 하고 있어 생산지는 중국이 아닌 이슬람에서 제작된 비단으로 보인다. 영화의 의상들은 화려한 색상이 특징인 인도 무굴 제국의 의상들을 참고한 것 같다. 


램프   

    

1, 기원전 1981-1640년. 2, 350 – 450년. 3, 6-8세기.
4, 13세기(1220 – 70년, 출처 뉴욕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

 

환경적인 이유로 아랍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을 담는 토기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토기에 담긴 물은 미세한 구멍을 통해서 증발하게 된다. 증발하면서 주위의 온도를 낮추고 습도를 올려준다. 이런 유용성 덕분에 물을 저장했던 토기는 현대적인 도자기 기술이 도입된 뒤에도 유약을 바르지 않았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유약을 발라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그리 유용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8-9세기 왕조 교체기에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약을 바른 도자기가 등장한다. 우마이야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의 교체기에는 유약을 바른 램프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토기 사발, 9세기, 출처 뮌헨 민속학 박물관


중국의 도자기가 장식성까지 겸비한 예술품이었다면 아랍의 도자기들은 생활기구이거나 종교적이었다. 아바스 왕조는 중국의 도자기에 매료되었다. 9세기 사발을 보면 중국의 도자기를 모방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엷게 유약을 발라 불에 구워냈다. 그 뒤에 안쪽 가장자리에는 푸른색 안료로 나무를 그려 넣었다. 중앙에는 소유자에게 축복이 있으라는 아랍어와 마호메트의 말을 전하고 있다. 중국의 도자기들이 부유층들의 수집품이었다면 아랍의 사발은 대중적으로 쓰였을 것이다. 중국 도자기의 재현에 실패했지만 이 실패는 뜻밖의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게 된다. 도자기 재현 실패에서 얻은 지식을 유리에 적용해 화려하고 아름다운 아랍 유리 제품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이 유리제품은 중국이나 동아시아까지 수출되기도 했으며 서양의 부유층이나 종교인들의 수집품이 되기도 했다. 중국의 도자기를 완전히 재현해낼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이 발전시키게 된 선명하고 화려한 색상은 지금의 이슬람 예술의 특징이 되기도 했다. 후대에 완벽하게 중국의 도자기를 재현하는 데 성공하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유리제품만 혜택을 본 것은 아니다. 도자기와 유리제품의 기술은 금속공예로 옮아가게 된다. 


금속 램프


이란의 사파위 왕조가 오스만 제국과의 찰디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란의 수많은 장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이동하게 된다. 이란과 페르시아의 장인들의 작품들은 오스만의 보석과 금속 장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의 수요는 공급을 불러일으켰다. 오스만 제국 이후의 이슬람 금보석 세공품들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다.   

    찰디란 전투;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반발한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 남부) 유목민들이 시리아와 페르시아로 도망가 붉은 모자를 쓴 자신들을 다른 사람과 구별해 “키질바시”라고 칭했다. 오스만의 칼리파 셀림은 키질바시들이 사파위 왕조에 동조해 자신을 공격하기 전에 사파위 왕조를 치고자 했다. 셀림을 저지하기 위해 사파위의 칼리파 이스마엘 1세는 키질바시들과 함께 찰디란에서 기다린다. 셀림은 사파위 군대의 전략적 실수와 키질바시들의 내분, 전투무기의 압도적인 위력으로 사파위의 이스마엘 1세를 1514년 9월 찰디란에서 제압하게 된 전투   

수통, 16세기, 출처 이스탄불 톱카피 궁 박물관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보석과 황금으로 장식된 공예품이 필요로 했다. 이슬람 제국 중 가장 부국이었던 무굴 제국에서 금속공예는 절정에 이른다. 영화 알라딘에 등장하는 귀금속들은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의 금속세공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램프 역시 그렇다. 오스만 제국 이전에도 13세기 이전에 금속으로 제작된 램프가 있기는 했지만 램프의 형태적인 틀을 잡아가던 정도였으며 장식성을 더해 화려한 모습으로 정착된 것은 오스만 제국 이후의 일이다. 


지니   

코란 양피지, 10세기, 출처 하버드대학 예술 박물관


이슬람에서 초자연적인 생물이거나 타락한 천사를 일컫는 지니는 복수로는 진(jinn)이고 단수로는 지니(jinni)로 불린다. 영화 속의 지니 모습은 아랍과 서양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몽골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니의 피부색은 모스크의 타일과 코란 구절의 배경색인 푸른색이며 그를 램프에 가둔 색은 황금색이다. 코란의 구절이 금색으로 쓰여 있다는 점에서 지니는 코란에 의해 봉인된 몽골인의 모습을 한 타락천사로 묘사된 것이다. 


이슬람 삶의 서사는 코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니는 코란 구절로 상징되는 금색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이슬람 정신에 벗어나려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슬람 인들은 정신과 물질을 연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마호메트를 조각상이나 어떤 성상 같은 물질로 나타내지 않는다. 신적인 것은 문자(코란)로서만 표현된다고 믿었다. 물질적인 욕심은 코란의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들도 세속적인 욕심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다. 


아바스 왕조 이후 종교와 정치군사 지도자인 칼리프에게 일정한 지역의 정치와 군사 권한을 부여받은 술탄들은 자신의 궁을 짓고 그 안에 세속적인 것들로 채웠다. 궁 안 벽화에는 인간이나 동물이 그려지기도 했으며 값비싼 직물인 비단으로 실내를 꾸미고 황금과 보석으로 궁과 자신의 몸을 장식하기도 했다. 지니가 램프에서 해방된 것은 코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물욕의 상징인 램프에서 분리되어 코란의 서사로 흡수된 것이다.


마치며


예술을 눈에 보일듯한 말로 표현하자면, 어떤 사람들이 세상에 펼쳐놓은 삶과 정신의 무늬다. 그 무늬가 우리에게 익숙해서 호감이 가고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또 낯설어 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이상하게 보이는 것을 왜곡 없이 보려면 먼 시선이나 꺼리는 마음이 아니라 조금 더 사려 깊은 시선이 필요하다. 그들 삶과 정신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려는 태도와 열린 마음에서 그 무늬의 의미를 파악해야만 한다. 이슬람 예술도 실제인 삶과 가상의 정신이 날줄과 씨줄처럼 얽혀 짜여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것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종교/사상사나 관습,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따로 떼어 편향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렇듯이 그들 또한 주어진 자연환경이나 사회환경 등의 차이 때문에 삶이 정신보다 느슨하기도 하고 정신이 삶보다 유연하기도 해서 이 둘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좀 더 쉽게 이슬람을 이해하려는 생각으로 그들의 삶과 정신을 극단적으로 일치시켜 단조로운 무늬로 파악하려 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들에 관한 편견이 만들어진다. 이슬람에 관해서는 특히나 편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느 문화건 다른 문화에 대한 검열기제가 있으며 편견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는 좀 더 그럴듯한 올더스 헉슬리의변명이 있기는 하다. 검열기제가 아니라 다른 것도 개입될 수도 있다.주의 깊은 시선이라면 이 글에서 소개한 몇몇의 작품들과 이슬람 사상사나 예술사는 외부인들이 아랍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시기와 어느정도 일치한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어쩌면 흔히 말해지는 이슬람에 관한 이야기들은 특정한 시기와 장소, 관습과 사상을 따로 떼어내어 파악하려 했을 수도 있다. 이슬람의다름을 우리의 무늬와 같은 방식으로 그려내려거나 삶과 정신을 극단적으로 일치시켜 이슬람을 파악하려다 편견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극단으로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은, 튀어나온 돌처럼 감각적으로 느껴지고 잘 보여서 쉽게 말해지는 편리한 장점을 가지지만, 단편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슬람에는 극단적인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잘 드러나서 극단적인 사람들이 먼저 포착되고 설명될 뿐이지 그들이 이슬람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극단의 뒤에 있는 이슬람 세계를 유연하고 사려 깊은 시선을 갖게 하는 영화를 매개체로 해서 그들의 삶과 정신의 반영인 예술을 들여다 보고자 한 이유다. 지평을 넓히고 시선을 높여 이 지구촌의 한 부분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이슬람 미술, 조너선 블름 /셰일라 블레어 지음, 강주헌 옮김. 한길아트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아무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