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꼭그래 Nov 19. 2019

The square

영화 속 미술의 역할 

더 스퀘어


영화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한 사건을 중심으로 벌이는 행위를 다룬다. 영화 관람은 이 행위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의식과 무의식이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 가를 아무런 관련 없는 관객의 입장에서 구경하는 일이다. 그래서 영화는 흡사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들의 움직임을 탐색하는 천문학과도 같다. 반짝임과 격렬함 같은 배우들의 어울림에 열광하기도 하고 자전과 공전들이 우리가 짐작하는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에 안도하기도 한다. 때로는 혜성이나 유성이 궤도에서 벗어나 지구와 충돌하는 것처럼 충격을 받기도 한다. “The square”는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는 절대 일어날 가능성 없다고 생각한 어떤 사건이 주인공 크리스티안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다. 제70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더 스퀘어”는 미술관에서 필연과 우연적인 사건의 궤도에서 여러 삶이 충돌하고 겹쳐져 펼쳐지는 한 남자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을 중심으로 세 개의 이야기로 되어있다.


시놉시스


첫 번째 이야기는 지갑과 핸드폰의 분실에 관한 이야기다. 출근하던 도중에 한 남성으로부터 피하려는 한 여성을 도와준다. 폭력에서 구해준 것이 뿌듯했지만 그가 알게 된 것은 지갑과 핸드폰을 소매치기당했다는 것이다. 핸드폰이 계속 켜져 있어서 위치를 확인해 보니 어느 빈민가 아파트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정확히 어느 호수에 사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크리스티안은 핸드폰을 찾으려 아파트 각 대문에 전단지를 돌린다. 어느 편의점으로 소포로 돌려달라는 전단지를 문 앞에 붙여 놓는다. 지갑과 핸드폰이 무사히 돌아오지만, 한 꼬마가 찾아와 무작위로 뿌려댄 전단지로 가족들이 자신을 도둑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꼬마의 행동이 미심쩍어 무턱대고 사과하기를 망설인다. 하지만 꼬마는 집요하게 크리스티안을 찾아와 끈질기게 사과를 요구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크리스티안의 일과 관련된 이야기다. 새로운 작품인 “The square”를 홍보할 영상을 제작해야 하는데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새롭고 충격적이며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광고 영상을 제작해야 한다는 직원들에게 맡긴다. 이런저런 다른 사건으로 정신없던 크리스티안은 직원들이 완성한 영상을 티브이 광고에 쓰이는 것을 승인한다. 하지만 그 영상으로 인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수석 큐레이터의 직업마저 위태로워진다.


세 번째 이야기는 파티에 만난 기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인간적인 만남으로 생각했지만 크리스티안은 단지 하룻밤을 보낸 것뿐이라며 기자와의 지속적인 인간적인 관계를 거절한다.


이야기의 형태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톰 소여의 모험은 소년들의 성장기이면서 미국이라는 곳에서의 삶을 이야기화한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점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와 같은 서사시가 되기 이전의, 설화나 그보다 작은 이야기 덩어리인 소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는 소문으로 끝나고 어떤 이야기는 설화나 신화처럼 크고 강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거쳐 성장한다. 소문이라는 가벼운 이야기가 설화라는 크고 강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지역과 세대를 넘어서야 하고 각 지역의 신앙과 결합해 신화가 될 가능성에 있다. “톰 소여의 모험”이야기의 출발은 미시시피 강 어느 지역의 소문에서 시작되어 강을 따라 성장해 설화가 되지만 미국이라는 드넓은 대륙의 경험으로 확장되지 못해서 신화까지는 되지 못한 이야기다. 마크 트웨인은 그런 이야기들을 모아 소설화한 것이다. 


톰 소여의 모험의 시작은 작은 마을의 누군가의 특이하고 재미난 경험담이었을 것이다. 마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비슷한 삶의 환경인 인접 지역 사람들에게 공유되면서 이야기는 커지고 퍼져 나갔을 것이다.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것은 이야기의 힘에 달려있다. 작은 하천이 큰 흐름인 강에 모이듯 가장 큰 힘을 가진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들이 모이고 뭉쳐져 더 큰 이야기가 된다. 처음에는 재미와 비밀을 공유하고자 말해지던 이야기가 커지고 커져서 큰 공동체에서는 지역의 정체성과 정신을 고양시켜주기 위한 동화나 설화가 된다. 이정도 까지 성장하게 된 다시 한 번 성장의 기회가 주어진다. 바람직한 삶의 모범이 되는 가치판단에 부합되는 믿음이라는 심리로 이루어진 신앙과 결합을 시도하게 된다. 신앙과 결합된 설화는 가치판단적 우월성을 확보하려 투쟁하는 영웅의 모험담이라는 신화가 된다. 하지만 “톰 소여의 모험”이 신화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재미는 있을지언정 가치판단적인 우월성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이 너무 넓다는 점이다. 강 유역이 아닌 초원과 사막과 험준한 산맥들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경쟁해야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얻은 교훈으로 생각해 보자면, 미국은 각 지역의 삶의 환경과 종교의 형태가 달라서 신들의 모임이 주재되고 결합되어 경쟁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작업 이후에야 미국의 설화가 신화로 변용할 가능성을 편입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톰 소여는 영웅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없게 된다. 그래서 성장할 시간이 적었으며 각 설화들의 경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두 가지 이유로 톰 소여의 모험은이야기가 성장해가기도 하지만 축소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야기를 축소해서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더 스퀘어”는 한 개인의 예외적인 이야기로 축소시킨 이야기다.


더 스퀘어의 이야기들은 공간의 크기와 위상에 따라 달리 말해지고, 보인다. 기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사적 공간과 미술관이라는 국지적 공간, 사건이 일어나는 광장이라는 사회적 공간으로 나눠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체 이야기들은 소통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공전한다. 소문이 중심 이야기라는 것은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와 같다. 하지만 “더 스퀘어”는 예외적인 사건을 통해서 설화가 되기 이전의 한 개인의 이야기에 머물게 했다. 


가능성 없을 것 같은 도둑맞은 지갑과 핸드폰을 되찾게 되고 부주의함과는 거리가 먼 큐레이터라는 직업적 성격을 무너뜨린다. 국지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에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 이야기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사적 공간에서는 책임감 없는 사생활을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이 세 개의 공간은 연결된다. 공간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에 미술작품을 연결시켰다.소통이라는 중심개념에 사건들이 공전하게 할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다. 여러 작품들이 등장하지만 이 글에서는 두 작품에 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처음 이야기할 작품은 데니스 패터슨의 작품이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그림이 그려지는 사각형 화판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시각 형식도 인간만의 오래된 보임 창인 사각이다.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안정감을 갖는 사각은 거미줄을 제외하고는 자연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거의 인간 만이 갖는 조형 틀이다. 


사각의 시각 형식에 거미줄로 한 인물을 붙잡아 놓은 것 같은 데니스 패터슨의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라는 작품이다. 휴 힐의 사진을 그림으로 그린 이유는 아마도 저 노숙자에게 다가가 좀 더 자세히 보고자 했을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거미줄에 걸린 어떤 벌레를 거미줄로 돌돌 말아 놓은 것 같이 보인다. 어쨌거나 영화가 데니스 패터슨의 시선을 제시했다면 그처럼 다가가 보자.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멀리 떨어져 지나치려 한다. 노숙자에게 다가가는 경우는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 때다. 그들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소비하게 하려 돈을 주기 위해서다. 그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호의는 한 가지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저 노숙자와 같은 상황에 절대로 처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 때다. 그래서 이런 호의는 안정감을 갖게 한다. 혹은 자신의 너그러움에 대한 만족감이나 가끔은 우월감을 갖기도 한다.


때로는 다투기 위해서 다가가기도 한다. 가난하다면 줄 돈이 없을뿐더러 생존의 경쟁자여서 저 공간을 차지하려는 다툼이 발생하게 될 뿐이다. 하지만 그런 다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저 공간이 다른 곳보다 구걸에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면 모를까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보다 더 성공적인 구걸을 위해서는 공간적인 이점이 아니라 더욱 가난한 모습의 차림새가 경쟁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가장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다. 당장은 저들과 같지 않지만 언젠가는 저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 사람이다. 


1998년 한국의 경제위기 이전과 이후의 거리에서 구걸을 해본 경험으로 말하자면, 경제위기 이전에는 드물긴 했지만 인간에 대한 박애 정신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험한 말과 행동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너그러움이 혐오의 감정보다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경제위기 이후에 너그러움은 불안으로 바뀌었다. 불안에 사로잡혀서인지 구걸하는 자들에게 험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의 불안함은 걸음과 표정에서 드러났으며 구걸하는 사람들의 공간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무의식이 행동으로 옮겨졌다. 가난한 자들의 공간에 진입해 너그러움과 박애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욕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아예 눈에 띄지 않게 하려 폭력을 행사해 그 공간에서 떠나게 하려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데니스 패터슨의 그림은 노숙자의 모습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과 의식을 보게 한다.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들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제일 먼저 노숙하는 사람에게 시선이 가게 된다. 처지와는 역설적인 의미인 용龍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모자와 움츠린 몸, 굽힌 다리와 신발의 상표가 보인다. 물병과 벌거벗은 여인의 사진을 통해서 아직 생명과 욕망이 내재된  상태임을 나타내고 있다.


모자는 커튼처럼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용도이기도 하고 노숙자의 시선을 닫아 놓는 역할이기도 하다. 냉기와 냉대에서 보호하려는 듯한 움츠린 몸짓과 앉은 채로 잠든 것 같은 접힌 다리는 제약된 신체임을 말하고 있다. 거리는 공공장소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에게 불편함을 초래한다면 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저 노숙자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숙자의 포즈는 구걸하다 편하게 쉬는 모습이 아니라 가진 것이 적은 만큼 제한되는 자세다. 


“일을 해서 거리의 삶을 끝내면 되지 않겠냐”라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은 그럴 수 없다.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을 하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리의 삶으로 건강상태는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지 않다. 일 했던 사람들 중에는 벌어 온 돈을 가슴에 품고는 다시 눈을 뜨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건강상태를 정상으로 되돌릴 환경을 갖추지도 못했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적인 인내심은 많지 않다. 밥 한 끼에 당장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만을 채워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니스 패터슨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상태인 태워서 폐기한 재와 같이, 청소할 때에나 확인할 수 있는 먼지처럼 정상적인 일상과 사회에서 멀어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으로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하나의 시선은 너그러움과 인내심을 가질 것을 말하고 있다.


다음 작품을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작품으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작업 NO. 227: 꺼졌다 켜졌다 하는 등

카메라의 등장은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카메라의 등장 이전까지 화가의 그림은 사진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해왔던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주의와 정밀주의 화가들은 사진과 경쟁했다. 사진과는 다른 것을 보여주는 것이 미술의 방향이라고 생각한 인상주의와 야수주의가 색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20세기 초에 사진이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이라는예술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지면서 사진이 담아낼 수 없는 색과 면을 이용한 입체주의가 등장하기도 했다. 사진이 담아내는 현실을 벗어난 추상주의와 절대주의, 구성주의,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등장하게 되기도 했다. 카메라와 완전히 차별화된 가치 지향성을 그림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진과 관련된 기술은 화가들의 생각보다빠르게 발전했다. 사진과 경쟁하기보다는 예술의 한 형태로 발전시키려던 백남준과 같은 비디오 아트라는분야도 등장했다. 수용하느냐 아니면 경쟁하느냐의 선택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념미술가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 사태를 인식했다. 


우리는 본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어차피 예술이라는 것이 최종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면 지각되는 개념만을 놓아두고자 했다. 그리고 관객을 그 작품에 참여하게 해서 관객의 눈이 카메라가 되게 했다. 개념미술가인 마틴 크리드의 “작업 NO.227:꺼졌다 켜졌다 하는 전등”이 이 설명에 적합한 작품이다. 마틴 크리드가 창조한 공간은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지각적인 공간이다. 보는 것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변화를 꾀한 것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서는 시각적인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대상이 없음에도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예술의 목적에 관해서 고찰하게 한다. 다음에 보게 될 영화에 등장하고 주제를 담아낸 The square라는 작품은 이런 바탕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The square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이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스퀘어라는 작품은 이렇게 정의된다. 그 안에는 시각적인 것이 없다. 신뢰와 배려, 권리와 의무라는 개념의 공간이다. 사각형은 인간의 문명을 상징한다. 조형물과 같은 사각형은 자연계에서는 거미줄이 거의 유일하다. 그런데 거미줄은 신뢰와 배려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거미줄에 걸린 무엇인가가 달려드는 거미에게 신뢰와 배려를 기대할 수도 없으며 살아야 할 권리를 주장하며 놓아줘야 할 의무를 거미에게 물을 수도 없다. 거미줄 안은 거미의 생존 본능만이 의미를 가지는 곳이다. 그래서 영화의 스퀘어라는 작품은 인간 사회를 의미한다. 


보도블록, 책, 지폐, TV, 창문, 책상, 식탁등 우리는 사각형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고 매 순간 그것을 확인하지는 않는다. 개념화된 무엇에서 무엇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동에 필요한 공간이 아닌 스퀘어와 같은 빈 공간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채우려 한다. 그나마 남은 곳은 스포츠에서 한정된 사람들이 경쟁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그곳 마저도 어떤 가치를 창출해내야 하는 상업주의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세상이다. 신뢰와 배려, 동등한 권리와 의무는 공동체를 지탱해 주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사회 계약서는 데니스 패터슨의 작품 제목처럼 태워지고 먼지처럼 우리 사회 밖으로 추방당했다. 탐욕만을 남긴 채. 


이야기를 미술작품과 어우러지게 하면서도 각각의 맥락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인상적인 점이다. 미술관 큐레이터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직업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깝게 느껴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누군가의 은밀한 사생활을 보여주고 직장생활이라는 일반적인 경험으로 가깝게 느껴지게 했다. 그 이야기에 흔하게 접하지 못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을 연결해서 해석하기 쉽게 했다. 이야기의 마무리도 잘 알려진 슬픔으로 끝내면서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The square”는 영화적 재미를 잃지 않았으며, 작품의 이해와 사회 문제를 연결하고 관객이 발견하게 해서 사회 문제화로 이끌어 내려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만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알라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