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정말 책을 읽고 싶은데 책은 내가 싫은가 보다.
얼마 전 책 한 권을 선물받았다.
책을 주신 분은 아마 모르시겠지만, 내게 책이란 일종의 네모난 결투장이다. 한 번 펼쳤다 하면 절대 마법으로 소환된 ‘잠의 요정’과 무수한 혈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요정이란 작자의 레벨은 만렙인 듯하다. 내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으니 말이다.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형태의 계산기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이 중요하고, 두꺼울수록 내 머릿속은 숫자 자판으로 가득 찬다. 내용을 곱씹으며(그리고 잠을 헤치며) 한 장을 읽는 데 5분이 걸린다고 하면 책 한 권을 마무리 짓는데 총 몇 분이 소요될는지 다급히 숫자판을 두드리는 것. 보통 300페이지 정도의 교양서 같은 경우 1,500분 정도가 걸릴 테니 60분으로 나누면 총 25시간이다. 하루에 1시간씩 읽어야 한 달에 겨우 소화할 수 있는 양이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책을 읽고 싶은 이상과 비루한 현실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나라는 존재에게 느끼는 실망감과 허망함, 그리고 실질적으로 유발하는 편두통과의 싸움! 이런 경험이 습관화되면 이제 네모진 물건을 볼 때마다 덜컥 겁부터 나는 것이다.
‘좋은 책이니 꼭 읽어보고 의견을 달라’는 말씀에 일단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얼굴에는 함박 웃음을 짓고 있지만, 무의식적인 공포감에 벌써 손에 땀부터 송골송골 맺히는 이중적인 상황을 이해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외형을 가진 이 요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에 또렷이 공감하게 될 테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고, 지식을 쌓는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도구이며 수천 년 전의 현인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가상의 창이라는 미사어구에 둘러싸여 막상 그 귀한 '책'님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내 모습이란, 책에게 버림받은 남자가 아닐는지. 난 정말 책이 읽고 싶은데 책은 내가 쳐다보는 것조차 싫은 것 같다.
이 가여운 책포비아의 운명은 언제 뒤바뀔는지. 천지신명께 신수를 떠 놓고 빌 일이다.
옴 마니 반메 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