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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Feb 11. 2021

트리를 철수했다.

2020 시즌 마감



지난 주말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창고에 넣었다. 11월 중순에 만들어 2월 첫 주를 보내고야 분해했으니 우리 집은 두 달 넘게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1년 중 1/6, 짧지 않은 시간이다. 충분히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겼음에도 트리 치우는 건 늘 아쉽다. 트리 철수는 한 시절을 접고 넘어가는 느낌이라 갈수록 질척거리게 된다.


우리 집 트리 높이는 180cm이다. 예전엔 사용하던 건 120cm 높이의 아담한 사이즈였는데 몇 년 전 한껏 욕심내어 내 키보다 큰 걸로 교체했다. 자고로 TV와 트리는 거거(巨巨) 익선이지 하면서.


아침에 일어나 방에서 나왔을 때, 겨울의 느긋한 해는 아직 어둠 속일 때, 반짝이는 트리 불빛을 보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게 참 좋다. 불빛을 보면서 한껏 몸을 늘려 기지개를 켜고, 물 한 컵을 마신다. 늘 하는 일이지만 트리 조명 덕분에 반복되는 루틴에 한 줌의 따스함이 더해진다. 조명과 심리의 상관관계가 분명 있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참 좋아하지만 설치하고 분해하는 과정은 꽤나 번거롭다. 설치는 완성을 기대하는 설렘이라도 있는데, 분해는 그냥 노동이다. 오너먼트를 떼어내 그동안 쌓인 먼지를 닦고, 나무는 벌어진 나뭇가지를 하나하나 오므린 후 3단으로 분리해 보관 가방에 넣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떨어지는 나뭇가지들도 많고 손이 긁히기도 한다. 보관 가방에 꾸역꾸역 넣은 나무와 오너먼트를 베란다에 딸린 작은 창고에 넣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부피도 크고 제법 무겁다. 비좁은 베란다에 놓인 자전거를 비롯한 각종 살림살이들을 버겁게 헤치고 창고에 이르면 창고 위 선반에 올리는 단계가 남아 있다.


창고 바닥에 둘 수 있으면 좋겠지만 창고 아래쪽은 버리지도 못하는 커다란 교자상 세 개와 다채로운 사계절의 부산물인 선풍기 등 계절가전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내 가슴께보다 좀 높은 선반 위로 올려야 되는데 이 과정이 가장 어렵다. 힘도 요령도 필요해서 바벨을 들어 올리는 역도선수의 심정이 된다. 겨우겨우 보관 가방 일부를 선반 위에 걸치는 데 성공하면, 안으로 꾹꾹 밀어 넣는다. 사람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보관 가방을 구석진 창고에 밀어 넣고 있노라면 영화에서 본 장면들이 떠오른다. 이민가방 같은데 시체를 넣어 은닉하려는 범죄자의 상황이 이럴까. 타포린 방수원단의 시커먼 보관 가방에는 성인 남성 키와 비슷한 180cm의 묵직한 나무가 3등분 되어 들어있고..... 음, 너무 나갔나....


창고에서 사투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와 바닥에 떨어진 먼지와 트리 잔재들을 치운 후, 두 달여 나를 행복하게 해 주던 트리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본다. 허전하군. 그렇지만 공간은 한결 여유 있어졌는걸. 청소기 돌릴 때도 편하고 말이야. 크리스마스트리가 좋아서 선풍기 꺼내기 전까지 두고 싶다고 늘 생각하지만, 트리가 없는 공간에도 금세 적응한다. 참 가벼운 애정이다.


입춘이 훌쩍 지나고야 미루던 겨울 흔적을 정리했다고 속 시원해했는데, 거실 장식장 위 동방박사 장식물을 깜빡하고 넣지 않았다. 시체 은닉.... 아니, 선반에 보관 가방 올리느라 너무 진을 빼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동방박사 가족에겐 한국의 사계절을 맛볼 기회를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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