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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Jan 10. 2024

요즘 (한시적)최애

이삭

TV는 잘 보지 않는다.

이것은 원래 내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주로 어떤 일에 대한 핑계를 댈) 필요가 있을 때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TV를 잘 안 봐서 요즘 유행하는 거 잘 몰라, TV 거의 안 봐서 가수나 아이돌은 잘 몰라, 어쩔... TV? 그걸 뭐 어쩌라고? 아, 유행어라고...??? 아니... 나혼자산다랑 응답하라 시리즈만큼은 꼭 챙겨보는데... 그래, 그게 좀 옛날 거긴 하지.

주로 이런 식.

스아실, "나 TV 잘 안 봐" 이렇게 말하면 "아니, 요즘 누가 TV를 봐요?"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엥? 그럼 TV 안 보고 뭘 봐?"라고 되물을 경우 그 뒤부턴 대화가 슬며시 끊기곤 해서 요즘 사람들이 TV 대신 주로 뭘 보는지는 잘 모른다.


그치만, 요즘은 TV를 제법 챙겨보는 중이다. 더 이상은, 유행에서 한참이나 뒤쳐진 특유의 거리감과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무지의 핑계로 'TV 잘 안 봐서...'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슬슬 다른 핑계를 준비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챙겨보고 있다. 뭐,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어쩌면 나는 이미 유행에도 상당히 민감하며 나도 모르는 틈에 많이 세련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암튼!! 뜬금없이 나의 세련됨을 자랑(에헴)하고자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요즘 챙겨보는 TV 프로그램과 최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지난 여름부터 이상형은 덱스였는데, 스아실 최애까지는 아니었다. 잘 생겨서 정말 재밌다, 정도? 대체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덱스는 그냥 숨만 쉬어도 재밌는데 확실히 최애까지는 아니었다. 뭔가 신경이 쓰인다거나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슬며시 불편해지는 일은 없었다. 이상형과 최애가 다르구나, 느끼던 중이었는데 지난주 목요일 밤에 드디어 그런 불편함이 생기고 만다. 아뿔싸, 이거슨 최애?! 불쑥 그런 예감이 들었다.


목요일 밤. 분명히 일찍 잠들었는데 남편이 코 고는 소리에 깨버렸던 거 같다. 다시 잠들기 위해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나가 TV를 켰다. TV에선 누군가가 이제 막 공연을 끝내고 있었다. 경연프로그램인 듯했다. 심사 위원들이 노래를 끝낸 가수에게 대뜸 좋아합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무대가 근사했던 거 같다. 기 빨리고 자극적인 건 딱히 취향이 아니라서 경연 프로그램은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라면 아마 다른 채널로 돌렸을 텐데, 심사위원들이 방금 막 노래를 마친 참가자에게 엄청난 칭찬을 하고 있었고 그걸 가만히 보다 보니 다음 참가자가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앞에서 저렇게 칭찬을 받아버리면 다음 사람은 어쩌라고?"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채널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보게 되었다. 


아마도 시작부터가 이미 그런 모양새로 기울어졌던 거 같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얼굴도 보기 전에 응원하고 있었다. 그 다음 출연자의 이름은 홍이삭이었는데 스아실 이삭이야말로 내 최애 메뉴다. 한창 야근을 밥 먹듯이 할 때 저녁 메뉴로 가장 좋아했던 것이 이삭 토스트와 딸기셰이크였다. '우와, 이삭토스트. 나 이거 진짜 좋아했는데...' 하며 잔뜩 반가워했다. 그렇게 이름 석자까지 듣고 나선 마음이 조금 더 기울어지고 만다. 

그리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이삭토스트의 노래가 끝날 때쯤엔 이미 울고 있었다.

나는 좀... 원래가 살짝 오버스러운 성격이라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며 감정을 증폭시키는 서사의 흐름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몰입하는 편인데 그날 이삭토스트가 부른 노래가 딱 그랬다. 감정을 조금씩 고조시키다가 문득 잦아드는 척하더니만 방심한 틈을 타 갑자기 웅장해지면서 쏟아내듯 폭발해 버려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엔 당해낼 재간이 없다. 별 수 없이 "뭐야, 이삭토스트... ㅠㅠㅠㅠ" 하며 밤에 혼자 울었다.


이 프로그램은 대체 뭔가? 다 울고 나서 뒤늦게 찾아보니 '싱어게인3'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주말 내내 이삭토스트가 그동안 불렀던 노래를 찾아보았다. 그걸 찾아보면서 깨달은 건데 언젠가 나한테 '요즘 누가 TV를 봐요?' 했던 사람은 아마도 유튜브를 보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주말 내내 유튜브를 보았으니까.

이삭토스트는 노래를 부른다기보단 스스로를 노래 속에 녹여내며 울부짖듯 자신을 쏟아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그 목소리에 담긴 서사가 궁금했다. 이삭토스트가 부른 '지구가 태양을 네 번'이라는 노래를 주말 동안 20번도 넘게 들었는데 듣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그러게... 대체 어느 년이야? 누가 쟤를 버려서 지구가 태양을 네 번이나 도는 동안 애를 저렇게 울게 하냐고..."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마음 아파했다. 영상을 찾아보는 내내 마음이 아득해지고 심장이 거슬릴 정도로 벌렁거려서 깨달았다. 이런 불편함이라니. 아뿔싸, 최애구나.


이 프로그램에서 지금 투표를 하고 있는 중인지 영상을 보다 보니 자꾸만 투표를 하라고 하던데, 투표까지 하면 덕질의 시작일 듯하여 그것만큼은 참고 있다. 사실 좀 귀찮은 것도 있는데, 그 귀찮음을 이겨내는 것이 덕질의 시작이겠지.

'태양이 지구를 네 번' 이 노래를 한 번만 더 듣게 되면 아마도 나도 모르게 사이트에 접속하여 정성스럽게 회원가입을 한 후 매일같이 투표를 하게 될 듯해서 그 노래를 부르는 영상은 더 이상 안 봐야지, 다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또 모르지 뭐. 결국 보아버리곤 쌍무릎 꿇은 채 "네네, 아마도 그 년이 저였나 봐요. 죄송합니다." 따위의 말이나 중얼거리며 멍텅구리 같은 표정을 하고선 투표하고 있을지. 내일은 목요일이고 이삭토스트가 노래를 한다.

간만에 누군가를 응원하게 되어(이런 종류의 응원은 덕선이 남편이 제발 택이였으면,,, 하던 응원 이후로 처음인 듯)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불편한 요즘이다.


+ 홍이삭의 별명이 홀리삭인가 보다. 종교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목소리나 감성이 워낙 경건하다 보니 그런 거 같다. 

++ 주말 내내, 주중에 연가를 사용하는 동안에도 내내, 이삭토스트 노래만 들었더니 나도 뭔가 홀리홀리 해져서 좀 곤란하다.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냥 쓰고 싶은 걸 쓰자. 그런 결심을 한 후로 연습 삼아 아주 얄미운 이야기를 쥐어짜고 있는데 자꾸만 홀리해지는 감정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 완전한 허구를 만들어낼 재주가 없어 우선은 익숙한 설정을 좀 가져다 쓰자 싶었다. 즐겨보는 프로그램인 나는 솔로를 선택했던 건데 망했구나, 생각 중이다. 오히려 핑계가 생겨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암튼 이삭토스트 때문에 자꾸만 홀리홀리 해져 간다. 지구가 태양을 네 번 도는 동안 책임지시라 따져 물으면 책임져 줄 것 같기도 한데... 홀리삭?

+++ 요즘 보는 프로그램. 나혼자산다, 태어난김에세계일주, 나는솔로, 모래에도꽃이핀다, 사랑한다고말해줘, 싱어게인3. 다 챙겨보려니 쌍당휘 쒼나고 쫌 바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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