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아무것도 읽거나 쓰질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 보단 어떤 글의 첫 문장이 써지지 않아 조금 머뭇거렸다고나 할까. 그러는 동안 수영과 프리다이빙에 홀딱 빠져버렸고 보홀행 항공권을 구매한 후론 아예 그 수중 세계에 빠져 있어 쓰다 만 문장을 손에 쥐고 서성이는 일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래도 '엇, 내가 읽지도 쓰지도 않고 있구나.'라고 문득 깨닫는 순간이 있긴 했다. 계절의 특성상 여기저기서 와글와글 거리던 때였다. 어느 아침 출근길에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을 들으며 달렸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도로 옆의 나뭇잎들이 나부끼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는데 그 초록의 순간 뭔가 울컥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한 일렁임이 밀려들 때면 늘 그 순간 속에 담긴 감정의 성질과 이유가 알고 싶었다. 무어라도 읽거나 쓰며 그 감정들을 치환하고 정리하곤 했는데 그즈음엔 도통 그러질 않았으니 그 순간 일렁였던 감정에 대해 꽤나 오랫동안 자주 생각해야 했다.
지난봄에 방송했던 '나는 솔로'의 기수가 20기였던가? 한창 화제였던 기수였는데 출연자 중 한 명이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본투비 문과인 내가 깜짝 놀라며 "헐... 저런, 멍청한 이과 녀석..."이라고 탄식하고 있으려니 뒤에서 남편이 양자역학 이야기를 거들었다. 현대 물리학으로 설명이 힘든 순간이 있고 그럴 때면 양자역학이 필요하기도 하지,라고 말하며 한참이나 뒤이어 떠들었는데 '나는 솔로'에 집중하기 위해 남편의 말을 자체 음소거해 버려 더 이상 듣지를 못 했다.
윤하의 노래를 듣는데 왜 하필 그 순간이 스쳤던 걸까. 그러한 일렁임 속에 내가 알 수 없는 소리와 빛의 입자들이 있어 우주 속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감정들과 부딪히며 상호작용하고 있었던 걸까.
언젠가 남편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광선이 제한적이라는 말을 하며 가시광선 스펙트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아들의 행동을 단편적으로만 보고 야단치고 있는 내가 못마땅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었겠지만, 나는 그때 전혀 다른 생각을 했더랬다. 내가 보지 못하는 광선들 속에 존재하는 빛과 그러한 빛의 굴절 속엔 어떤 감정들이 담겨 있을까. 나는 언제나, 수만 가지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중에 가장 으뜸은 사랑이라 여기고 있어, 남편이 양자역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가시광선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 신비함 너머에 있을 어떤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그 일렁임 속엔 틀림없이 사랑이 있을 테지. 내가 결코 볼 수 없는 광선속에서,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현상 속에서, 빛을 내며 반짝이고 울리고 진동하며 나를 스쳐가는 그 모든 것들 속엔 사랑이 있을 테지.
뭐...... 사건의 지평선이 어쨌든지 간에, 나는 솔로가 어쩌고저쩌고든, 양자역학이 무어든. 문장 하나를 쥐고 서성이기만 했던 계절이 또 하나 접히고 있다. 나는 다음 주면 보홀을 거쳐 다시 보라카이로 떠난다. 쓰다 말았던 글 중엔 보라카이 여행기도 있어 요즘 그걸 꺼내 보며 처음 바닷속에 들어갔던 때를 떠올리고 있다. 지구를 감싸고 있는 구름을 걷어낸 후 우주 속으로 쑤욱- 고개를 내밀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던 그 바다가 많이 그립다. 며칠 전 잠수풀에서 20미터를 찍었는데 그렇게 수심을 뚫고 들어가는 동안 점점 폐가 작아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그때 그 바다에서 느꼈던 무중력이 떠올라 호흡이 가빠왔었다.
문득 이번에는 꼭 노란 비키니를 입고 오마이걸의 던던댄스를 들으면서 맥주를 마셔야지,라는 다짐을 한다. 맥주를 마시다가 바다에 뛰어들어가 돌핀킥을 해야지,라는 다짐도 한다.
지난번에 샀던 노란 비키니는 내가 입기엔 너무나도 깜찍하여 옷장 속에 꼭꼭 숨겨두었다. 누가 볼까 조금 수치스럽기까지 하여 그저 죽을 때 관에 넣어달라고 해야지, 생각했었는데 가시광선 스펙트럼을 벗어난 시선으로 봤을 땐 꽤 괜찮지 않겠느냐 싶기도 하여 '이번엔 꼭 입고 말겠다!!' 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는 중이다. 그게 뭐 그렇게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결의'씩이나 다질 일이냐 싶지만, 실은 남편이 노란 비키니를 입은 나를 좀 귀엽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서 그런 가 보다.
연휴 동안 여행 가방을 싸면서 작년 여행과 지나쳐 온 봄과 그동안 나를 스쳤던 감정들을 떠올리다가 노란 비키니까지 생각이 닿았다. 관에 넣어달라고 하지 말고 지금!! 지금 입어야지!! 생각하다가 불쑥 밀려드는 어떤 다짐들과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어떤 빛들과 그 속에 담긴 어떤 마음들은 대체 어떻게 연결되어 어디로 흘러가나, 를 내내 생각하고 있어 도통 짐 싸기에 진척이 없다. 이러느니 이 순간에 대한 글이나 남겨보자 싶어 또 이렇게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진짜로 짐이나 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