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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호 Apr 14. 2016

죽음의 무게

어떻게 죽어야 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교회 신앙 깊으신 권사님은 집에서 가족들의 돌봄 속에 잠이든 상태에서 고이 세상을 떠나셨다. 가족들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지만 오히려 감사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난 정말이지 그렇게 가정집에서 한 노인의 죽음을 맞아본 것이 처음이다. 예전에 암으로 사경을 헤매다 문안 온 목사님을 마지막으로 알아보고 꺼이꺼이 반기던 성도님의 마지막 모습도 문득 떠오른다. 세상의 어떠한 죽음도 그 무게를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다.


동물은 어떤가? <섬>이라는 책에서 장 그르니에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 물루를 어쩔 수 없이 안락사시키는 장면을 기록한다. 어느 날 집을 나갔다 온 물루가 한쪽 눈이 실명될 정도로 심하게 다친다. 고양이를 누구에게 맡길 수도 없고 자신은 그곳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그냥 두고 가자니 주변 동물들에게 괴롭힘 당할 것이 뻔했다. 고육지책으로 안락사를 택한다. 주사기 앞에 한 생물의 무력함 이라니. 아무리 힘겹더라도 자기 생을 사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자살은 어쩌면 인간만이 행하는 것이리라. <십 년 후에 죽기로 결심한 아빠>는 내일로 시집을 앞둔 딸이 자신의 아버지가 십 년간 남겨놓은 유서를 발견한다는 내용의 책이다. 아빠는 십 년 동안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자신의 장례는 수목장으로 계획하고 누구보다 딸이 자신의 죽음을 자랑스러워해주길 바라며 남몰래 편지를 남겼다. IMF로 실직을 당하고 그 와중에 일을 나가던 아내를 사고로 먼저 보내고 실화 같은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무거운 현실을 짊어진 가장의 벼랑 끝이 시렸다. 어찌나 사실 같던지.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살고 싶다는 반증이 아닐까? 어쩌면 경향신문에서 기자생활 24년 동안 기자생활을 한 윤희일 작가는 취재를 하며 마주한 자살 속에서 그들이 세상에 남긴 유서나 휴대전화 메시지 같은 흔적들을 마주했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흔적이라는 것이 그렇다. 사라진 망인을 세상 속에 다시 드러낸다. 그것은 누구도 되갚을 수 없다. <일그러진 풍경>이란 연극의 배경은 맛깔스러운 소풍 음식들이 주인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머릿수대로 (주인이 온다면) 갚아주면 된다며 만찬을 벌인다. 누군가 마련한 포도주 잔을 부딪히고 분위기는 무르익어 간다. 마지막 반전은 그 만찬의 주인이 그 근처에서 자살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결국 머릿수대로 갚으려던 계획은 소용없게 된다. 그들의 죽음 앞에서. 어쩌면 망자가 남겨놓은 마지막 선물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람만이 자살을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자살의 도덕적 논쟁을 떠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말이다. 자살 일기를 기록한다는 것, 고민이 충만한 가장으로서 가능한 이야기다. 어쩌면 그가 십 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짜장 인생은 그런 역설이 빚어내는 것 이리라. 자신의 일상에서 죽음이나 상실이 비치지 않는다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진실로 삶은 죽음의 무게를 얼마나 느끼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삶과 죽음, 영광과 수치, 역경과 형통이 똑같아질 때에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는 완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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