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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호 Oct 02. 2015

욕망과 이상의 경계

꿈속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가 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든 일을.  어릴 적에는 날아다니는 꿈을 많이도 꿨다. 무슨 구름을 타는 것이 아니라 몸에 집중을 하면 하늘을 붕붕 날았다. 그러다 꿈을 깨면 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꾼 이후에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는 사람이었는지, 사람이 된 꿈을 꾸는 나비였는지, 자신은 모른다고 말했던 것처럼 혼돈스러울 때가 있었다. 공상에 빠져 내 몸에 집중하면 날 수 있다는 상상을 했다. 심지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다 천정에서 하늘 소리를 들려 주시길 바라곤 했다.

 

며칠 전 꿈속에서 난 칼로 사람의 배를 찔렀다. 충격이다. 예전엔 총에 맞아는 봤는데. 그땐 정말 맞는 그 부위가 뜨겁기까지 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을 찌를 줄이야. 아무리 꿈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잠재된 분노인가? 분한 마음이 꿈속에서 폭발한 것일까? 꿈과 현실은 분명 단절된 무엇이다. 순서를 따진다면 현실이 먼저이고 꿈은 나중이다. 현실에서 좌절된 욕구가 꿈에선 이루어지는 것 같다. 발산되지 못한 분노가 꿈에서 폭발했던 것일까.


을 꾸는 동안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자는 것이지만 자는 것이 아니다.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이랄까? 내가 그렇게 사람을 찌를 줄은. 이게 현실이었다면? 끔찍하다. 꿈이라는 것이 다행이다. 어찌되었던 내 분노가 소비되었으니 말이다. 사내들의 몽정이라는 것도 그렇다. 쌓였던 정액은 야릇한 꿈속에서 쏟아진다. 꿈은 완충제역할을 한다. 소망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불만이 해소되기도 하고. 모든 것을 담아내지 못하는 현실의 그릇을 넓혀주는 것 같다. 꿈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는데 이것은 무언가 부족한 현실을 반영한다. 꿈에서 발견되는 나의 욕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내 본질이 아닐까. 언제쯤 욕구를 이룰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고상한 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에서 출발한 꿈이 아니라 그 반대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즉 현실을 유발케 하는 꿈 말이다. 이것은 꿈에서 시작한 현실이라 말할 수 있겠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란 책에서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라는 갈매기는 자신이 꿈꾸는 '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파닥거리며 날아가는 것은 나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한 마리의 모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많은 이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나는 법을 배울 때 찾아올 보람과 영광을 생각하지 못할까?

 이것을 꿈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그저  ‘꿈꾸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꿈꾸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꿈에서 시작한 현실이란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소설 <어린 왕>에서 어린 왕이 꿈을 꾸고 난 후에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왕은 대관식을 앞두고 꿈을 꾼다. 그는 임종이 가까워진 늙은 왕을 대신하여 왕위를 계승한다. 왕으로 대관식을 앞두고 자신이 입을 금 옷, 루비 왕관, 진주 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꿈으로 보게 된다. 왕이 입는 옷에는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이 깃들어 있었다. 꿈 이야기를 하며 그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것들을 짐의 눈에 보이지 않게 치우라. 이 옷은 고통의 흰 손이 슬픔의 베틀로 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루비 안에는 피가 담겨 있고, 진주 속에는 죽음이 있도다.

그는 꿈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보았다. 자신의 대관식에서 입을 복장을 만들기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절규를 들었다. 그는 그것들을 입기를 거부한다. 대신 누더기를 걸친다. 꿈 때문에 현실이 다르게 보이고 다른 삶을 산다. 이것이 진정으로 꿈꾸는 보람과 영광이지 않을까. 현실의 감추어진 이면을 들추어 진실을 보며 그러한 진실에 자신의 인생을 걸게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어린 왕은 하늘에서 내려준 의복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대관식을 치른다. 하지만 꿈에서 비롯되어 어린 왕이 뒤엎었던 현실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었다. 왕에게 어울리는 옷을 그가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꿈으로 현실을 이루려면 비난받을 준비를 해야만 할까? 사실 <갈매기의 꿈>에서 조나단이라는 갈매기는 자신의 꿈 때문에 무리로부터 수치스러운 추방을 당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어린 왕도 꿈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모양새 때문에 반란이 일어난다. 꿈에서 비롯된 현실은 녹록지 않은 것이다. 현실이 반영된 꿈과 꿈이 반영된 현실. 전자는 욕망이요 후자는 이상이다. 괴테는 꿈이란 쓸모없는 복권 한 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고 헤겔은 역사를 꿈의 집합에 견주며 시대의 정신이라 추켜세웠다. 이처럼 욕망과 이상의 간격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꿈과 꿈은 인간이 완벽히 다다르지 못하는 영역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불만족스럽거나 다다르기 힘든 이상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야곱의 사다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장 그르니에가 말한 것처럼 ‘꿈 없는 잠’이야말로 불행에 대비한 확실한 피난처가 아닐까? 그렇다면 꿈은 행복을 위한 불확실한 탈출구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누구도 그 끝을 알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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