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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호 Oct 11. 2015

비겁한 레위 남자

사사기 20장 1절-7절

비겁한 레위 남자 / 삿20:1-7     


한 레위인이 등장한다. 신분상으로 레위인은 제사를 수행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는 첩을 두었다. 첩 제도는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인 관행이었고 구약의 율법에서도 허용되었다(창16:2-5). 아브라함도 자식문제로 첩을 들이지 않았던가. 레위인이 첩을 두었다는 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레위인의 사람을 대하는 인격에 있다.  

    

레위인의 첩은 그로부터 도망친다. 개역개정으로는 ‘행음하다’고 기록된 내용은 새번역으로 ‘무슨 일로 화가 난’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즉 이 여인은 레위인에게 화가 나서 집을 떠났다. 레위인이 그를 찾으러 길을 떠난 이유는 그녀를 다시 데려오기 위함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새번역의 번역을 타당하게 보는 이유다. 그 여인이 화가 난 이유는 아마도 레위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소에 그가 그녀를 어떻게 대하였는지 이어지는 뒷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행음하다'는 표현은 그녀가 자기 집으로 떠났기에 이혼의 정식적인 절차는 남자 편에서 이루어지기에 남성 중심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여자가 질려서 도망갔다는 말이다. 아 레위남자여.     


장인의 집에서 정성스런 대접을 받은 레위 남자은 자신의 첩을 데리고 길을 나선다. 장인의 대접을 거절하고 떠나는 길이다. 그동안 장인은 나흘 동안 그를 정성껏 대접했다. 장인이 그를 융숭하게 대접한 이유는 첩으로 들어간 자신의 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레위 남자에게 사람 대접받기를 원하는 마음에 간청이 더해졌을 것이다. 마치 거친 돌을 다듬는 석공처럼 극진하다. 하지만 남자는 끈적끈적한 땀을 닦아내듯이 길을 나선다. 귀찮다는 듯이 그의 발걸음은 기브아로 향한다.     


사건은 이곳에서 발생한다. 기브아는 레위 남자가 머물 지역으로 이방 성읍을 피해 들어간 곳이다(19:12).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곳에서 그는 봉변을 당한다. 우선 자신을 환대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를 환대한 사람도 기브아 원주민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 기브아에 거류하는 노인이다. 즉 이방인이다. 레위인이 기대했던 동족의 환대가 아니라 이방인의 환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대접한 노인이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손님을 보호해 줄 만한 친인척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레위 남자 일행은 이방인의 집에 머물며 위험에 노출된 것이다.   

   

여기서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밤사이에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기후적인 요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난폭한 사람들의 위협을 말한다. 기브아 성읍에서 나타난 건달들은 집 주위를 삥 둘러섰다. 그리고 노인의 집에 묵고 있는 손님을 요구한다. 겁탈하려는 이유에서 그를 원했던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사람은 레위인이며 그들 자신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이들을 대처하는 레위인도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의 첩을 내준다. 마땅히 꾸짖으며 그 상황을 부딪쳐야 하는 것을. 그들은 이스라엘인이며 자신은 레위인이다. 그는 그들의 지도자란 말이다. 난 이 말을 내게도 크게 외치고 있다. 과연 지도자의 자격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레위인의 첩은 무참히 건달들에게 짓밟혀 목숨을 잃는다. 이 여자의 죽음을 대하는 남자 레위인은 냉정하기 짝이 없다. 그녀를 내주는 것도 그렇고 그녀의 죽음에 일말의 양심도 없다. 그저 복수심에 불타 그녀의 시체를 12조각을 낸다. 그리고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배달한다. 이는 자신을 모욕한 기브아를 혼내주기 위함이다.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은 그는 기브아인의 잘못만을 고발한다. 그가 자신의 첩을 내주었다는 사실은 숨긴다(19:25과 20:5 비교). 기브아인의 잘못만큼 레위인은 철저히 타락했다. 그가 여인을 대하는 평소의 태도는 여자가 그를 떠나게 했으며 자신이 살기 위해 기브아 인들에게 내주었으며 그녀의 안위는 관심에도 없었고 그녀의 시체는 복수를 위해 이용될 뿐이었다. 결국 이것은 동족 간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어쩌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었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이방신들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그들을 먹이셨다. 이들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렇게 내버려두신 이유가 뭘까? 이는 이들 스스로 택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운명과도 같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보기에 옳은 대로 행동했던 것이다(17:6).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자식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면 그들은 소돔 사람들과 다름없어진다.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레위인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거짓으로 싸움을 부추긴다. 마치 거룩을 되찾는 성전(聖戰)을 치루는 것 같지만 거짓으로 범벅된 복수일 뿐이다. 제단에 더러운 피가 뿌려진다. 자신들을 속이며 제단을 높이 쌓아 올리는 형국이다. 여기에 케네스 리치의 글귀가 곱씹어진다.    

  


“히틀러 자신은 명백하게 반기독교적인 영향력을 공개적으로 행사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히틀러는 진짜 기독교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도덕 질서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위험을 방어하자고 호소했다. 이러한 호소는 아직까지도 많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단순히  반응하기에 앞서, 역사의 교훈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하나님> 케네스 리치 183



우리는 여기서 자신을 망가뜨리는 작은 죄가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너무나 무뎌져 한 사람을 못보고 있는지. 그저 어떤 목적을 위한 대상으로 대하고 있지 않는지. 한 사람이 소중하다. 그 사람은 목적을 위해 도구화 될 수 없다. 그것이 어떤 대단하게 거룩한 목표라 할지라도 그렇다. 목표가 위대하고 거룩할수록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한 사람을 도구화하는 것은 인류의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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