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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산책 Mar 07. 2024

퇴근했다고 업무 생각을 안 할 수 있는건 아니니까

짠해서 위스키

  퇴근 시간이 임박했을 즈음, 나는 아직 회의 중이었다. 관리자가 바뀌어 들어온 첫 회의라 더 긴장하며 참여하고 있는데 내가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긴장한 걸 티내지 않으려고 -습니다. - 한 것 같습니다. -하면 좋겠습니다. 등으로 어미를 적절히 바꾸어 가며 '적당히 잘' 이야기하려 노력 중이었다. 그 회의의 담당 부장이 중요한 내용 몇 가지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 나는 답을 하고 다른 팀원들의 의견도 묻고...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관리자의 마이크가 켜졌다.


 "이거 회의 주관하는 부서에서 이해를 잘 못하고 있는 것 같네요. 서로 좀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다시 해야겠네요. 며칠 안으로 준비해서 다시 회의하죠. 이 부분만 다시 합시다."


 딱딱한 말투. 다들 당황했지만 아무도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나가려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발표를 하고 있던 나도 회의를 연 부장도 당황하긴 마찬가지. 평소 관계가 좋은 부장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참 딱해보인다.


  관리자는 부장을 싫어한다. 지난 번에는 둘이 업무 이야기를 한참 진행하다가 끄트머리에 관리자가 부장을 향해 윽박을 지르는 일이 있었고 부장은 자존심에 엄청난 스크래치를 받았을거라는 말이 떠돌았었다. 물론 나도 그 부장이 일을 잘하는건 아니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고 나 또한 그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자기보다 나이 어린 관리자가 언성을 높이며 윽박지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관리자가 부장을 저격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발표를 하고 있는 동안 부장이 내용 이해를 잘 못하고 있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 사실 아무도 그 속은 모른다. 어쩌면 부장이 맘에 들지 않은 만큼 나에게 불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내가 실수한 부분이 있었는지도.


  회의가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메시지가 왔다. 관리자의 메시지.


  '잠깐 전화 좀 주세요.' 


  메시지를 본 순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몇 분 전에 온 메시지. 급히 전화를 했지만 관리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한다. 관리자의 자리에 찾아가기로 했다.


  관리자의 책상에서 한 20미터쯤 떨어진 자리에 부장의 자리가 있다. 관리자에게 가고 있는데 부장이 슬쩍 나를 부른다. 


  "아까 놀랐지? 나도 진짜 당황스러웠어. 이거 진짜... 아무튼 고생이 많아."


  부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기보다 나이 어린 관리자가 또 자기를 저격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저 양반 갑자기 수가 틀린 건지 왜 저러는건가 속으로 욕을 하고 있는걸까. 퇴근시간이 이미 지나버렸고 나는 나가야 한다. 워킹맘의 숙명, 두 번째 출근을 해야한다. 하지만 지금 이런 찜찜한 기분으로 관리자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전에는 도저히 퇴근을 할 수가 없다. 


  관리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른 층의 어딘가에서 다른 부장과 이야기 중이라며 나를 부른다. 급히 가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아, 미안합니다. 아까 발표 중에 중단한 건. 우리... 그 회의 진행한 000부장이 워낙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추가 자료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지난 번 얘기한 그 자료랑 예시 몇 가지 더 추가해서 준비 좀 해줬으면 하는데."


  나에게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부장에 대한 악감정은 여전하고 그에 대한 불만에 이런 사단이 났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추가 자료 더 준비해서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라며 공손히 자리를 나왔다. 다행히 오늘 따라 차가 막히지 않아 두 번째 출근도 잘 할 수 있었다.

 

  집에 오는 길에 그냥 조용한 음악을 계속 들었다. 업무 생각이 계속 났다...


  짠하다. 그 회의 자리에 있던 팀원들과 퇴근 시간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던 다른 동료들. 특히, 전달할 내용이 있다고 했는데 회의가 길어지며 결국 얘기 못 하고 가버린 옆 자리 동료. 표정이 정말 좋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는건지. 


  나도 짠하고. 그도 짠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위스키 한 잔 작게 따라서 얼음잔에 콜라까지 넣어주고 한 입 마셨다. 조금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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