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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이나 폴 토마스 앤더슨 류의 감독들이
만든 영화에선 디테일이 생명이다.
카메라의 구도, 소품, 시선 처리까지 세밀하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볼 때면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굳이 일일이 따지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구도의 안정감이나 소품의 중요성,
시선의 미학 등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하려면 상당한 수고로움과 피로를 각오해야 한다.
영화를 볼 때마다 감독의 의도나 소품의 의미를 해석하는 게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쿠엔틴 타란티노 류의 영화,
다소 쉽고 본능적이며 빠르게 이야기가 진행하는 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도 훌륭한 영화 감상법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고의 역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 역시 피로감을 강요하는 영화는 아니다.
2005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에
빛나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스토리로 보면
전반부와 후반부로,
인물로 보면 세 인물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영화는 매기 피츠제럴드가 프랭키 듄의 도움을 받아
늦은 나이임에도 복서로서 성공하는 전반부,
챔피언 매치에서 맞붙은 독일 창녀 출신
“블루 베어” 빌리의 반칙으로 인해
전신마비가 되어 살아가는 후반부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 영화 이야기는 편안하게 진행된다.
스포츠 영화의 전형적인 이야기처럼
돈도 빽도 없는 매기가 권투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원래 여자 선수를 두지 않는 프랭키는
그녀의 열정을 인정해 매기를 단련시킨다.
매기의 재능과 프랭키의 관리 덕분에 매기는
프로 복서로서 성공하는 지극히 평범한 스토리다.
후반부도 인간의 존엄,
생명의 가치에 대한 윤리적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긴 힘들다.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서론에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피로감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까닭은 간단하다.
이야기의 디테일이 다소 부족하기 때문이다.
31살이나 먹은 매기의 권투 재능이 어디서 왔는지,
왜 프랭키는 딸을 만나지 못하고 떨어져 사는지,
덜떨어진 데인저 바크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는지 등
영화 스토리는 복싱처럼 거칠고 불친절하다.
심지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
프랭키가 매기의 소원을 들어주는 장면도 어설프다.
프랭키가 매기의 목에 달린 기계 장치를 땠을 때
아무런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경고음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이런 디테일한 부분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바르셀로나처럼 티키타카가 필요한 영화가 있는가 하면
호날두한테 공을 줘버리고 맡겨야 하는,
이를테면 선 굵은 축구 같은 영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단연 후자에 가깝다.
이런 디테일함을 빼고 영화는 우직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와 주제를 향해 걸어 나간다.
초반엔 꿈을 향한 매기의 열정과 노력,
중후반엔 새로운 가족으로서 프랭키와 매기를 조명하고
후반엔 인간의 존엄성과 프랭키의 고뇌까지.
묵묵히 한 곳을 향해 달려가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그만큼 이해하기 쉽고 피로감이 덜하다.
누가 뭐래도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프랭키와 매기이다.
하지만 그들 다음으로 중요함과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인물을 뽑으라면 단연
모건 프리맨이 연기한 ‘에디 듀프리스’이다.
한때 복서였던 에디는 현역 시절
눈에 들어간 피 때문에 한쪽 시력을 잃고 은퇴한다.
그리고 현재 프랭키 체육관에서 잡일을 하면서 지내는 인물이다.
이 인물이 흥미로운 이유는
누구 편인지 애매모호한 포지션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매니저가 프랭키의 선수에게 관심을 갖자
이를 프랭키에게 알려주는가 하면
매기에게는 프랭키와 함께 있으면 타이틀을 딸 수 없다며
비밀리에 다른 매니저를 추천해준다.
아리송하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매력 있는 이유는
다친 매기가 목숨을 연명한 모습이 에디이기 때문이다.
전 뭔가를 해냈고 세상을 봤어요.
사람들은 내 이름을 환호했어요.
잡지에도 났었고.
언제 그런 꿈을 꿔 보겠어요?
아빠는 내가 세상에 오기 위해
힘들게 싸웠다고 했어요.
떠나는 길도 그렇게 가고 싶어요.
더는 바라는 게 없어요.
난 원하던 모든 것을 했고 가져 본 거예요.
그걸 빼앗기게 하지 말아 줘요.
그 환호소리가 안 들릴 때까지
여기 누워 있게 하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매기의 존엄사 부탁에 프랭키는 거절하지만
이를 들은 에디는 프랭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매기는 용기 하나로 여길 왔고
자네의 덕분에 1년 반 만에 타이틀전을 가졌어.
죽는 사람들은 많아.
걸레질하며 접시를 닦는 사람들.
그들의 변명이 뭔지 알아?
자긴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지.
자넨 매기에게 기회를 줬어.
죽으면서도 그 애는 이렇게 생각할걸?
‘난 정말 행복했다.’
나라면 여한이 없을 거야.
에디는 매기의 영광과 시련을 모두 겪은 인물이다.
이 대사를 들은 순간 에디가 무척이나 불쌍해졌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영화에선 가볍게 다뤄지지만)
경마에 모든 돈을 쏟는가 하면
매기의 타이틀 전을 위해 평생 동반자인 프랭키를 배반하기도 한다.
그 영광의 맛을 알기에,
권투를 하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비루한지 알기에
에디는 그렇게 행동했다.
영화 제목인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대전료 백만 달러짜리 경기를 가진 매치,
모든 상품이 1센트인 가게에서 백만 불 이상의 가치를
가진 물건을 발견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1센트 가치도 안 되는 가정에서 태어난 매기가
대전료 백만 달러짜리 경기를 가진 인물로 재탄생하고
이후 인간의 존엄에 대해 던지는 질문과
그녀의 결단은 분명 백만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