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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un 10. 2024

고1. 야구로는 1회초

고1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아빠의 이야기

1회초 9점을 득점하면 이 경기는 이긴걸까?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들이 입학 후 얼마지나지 않아 3월에 전국 모의고사를 보고 왔다.

(놀랍게도) 중학교 때 성적 수준 그대로이다.

놀라운 이유는 뭔가 새출발하는 마음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새롭게 출발한 고교 생활이라면

뭔가는 달라져 있을 수도 있겠다는 야심찬 생각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걸 바로 허황된 욕심이라고 해야하겠지...


곧 이어진 4월에는 첫 중간고사를 보고 왔다.

받아온 점수의 점수대역이 낯설다.

굳이 왜 이런 미지의 점수대를 개척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 

그리고 아쉬움과, 슬픔과, 허탈함이 함께 뒤섞여 밀려온다.


학생이 본분인 아들에게 제일 해주기 어려운 것은 방에 큰 책상을 놓아주거나, 

시원하게 공부할 수 있게 에어컨을 달아주거나, 

티비에서 본 미국의 학교들처럼 대형 화이트보드를 붙여줘서 언제든지 생각나는 것을 적어보며

생각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왜 공부를 해야하고, 잘했을때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이와 함께

만일 열심히 했는데도 기대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그 때에는 실망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꾸준히 걸어나가야함을 알려줘야할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다.


잔소리가 되지 않도록 말을 아끼고 싶지만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얘기를 차곡차곡 모으다가 중간고사가 끝난 그 마지막날

쓰린 속을 부여잡고 아들이 좋아하는 장난감(프라모델..)을 사주고 영화를 함께 보고

돌아오는 길에 슬쩍 하고 싶은 얘기를 꺼내봤다.


"아들. 너 야구가 1회 초 공격부터 시작해서 9회 말에 끝나는거 알지?"


야구에 관심이 없는 아들이라 이렇게 밑밥을 깔면서 시작을 했다.


"야구는 어찌 되든 9회말까지 봐야 승패가 결정되. 

 그런데 만일 니가 1회 초에 10점을 딱 내버렸다고 생각해봐. 어떨것 같아?"


"음.. 좋을 것 같은데요?" 


아.. 그냥 좋다는 그냥 그런....


"아마 1회초에 10점을 내게 되면 그 팀은 그 경기를 거의 이길 가능성이 높겠지?

 그리고 2회부터 9회까지 경기를 수월하게 치를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지금 공부를 열심히해서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을 간다는 건 

 1회에 꽤 많은 점수를 낸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싶어. 

 야구로는 2회에서 9회라고 볼 수 있는 남은 인생이 좀 편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걸 조금 더 살아본 어른의 경험으로 알려주고 싶네"


얘기를 듣는 아들의 표정에 큰 울림이 아직은 없는 것 같아 몇 마디 더해본다.


"그런데 이렇게 1회에 10점을 내면 그 팀은 그 경기에서 이긴 걸까?"


"아닌 것 같은데요"


"맞아.. 아직 이긴 건 아니야. 

 이길 가능성이 높은 것이지 이기고 지는건 9회가 되고 경기가 끝나봐야 있거든. 

 만약에 1회에 10점 냈다고 2회부터 9회까지 엉망으로 경기를 하면

 상대팀이 차곡차곡 점수를 내서 최종적으로는 상대팀이 이길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경기 내내 열심히 해서 최종적으로 이기는 것도 좋긴한데 

 그런 경기는 경기하는 내내 굉장히 치열하고, 힘들고, 이길 수 있을지 지게될 것인지 확신도 없고,

 어려운 경기가 될 것 같아.

 나는 그냥 내 욕심에는 1회에 우리 아들이 10점 내고

 남은 경기, 남은 인생을 조금 더 순탄하고 여유롭게 그렇게 보냈으면 좋긴 할 것 같아."


"중요한 것은 1회에 점수를 많이 냈다고 아직 이긴 것도 아니고, 

 초반에 점수를 많이 못낸다고 그 경기를 꼭 지는게 아니라는 것이고, 

 좋은 대학에 가게된다고 그 하나로 인생 그냥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대입에서 조금 실망하더라도 인생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건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공부를 지금 열심히 하는 것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를 설명해 줄

너무 좋은 비유를 생각해냈다는 것에 스스로 조금 만족감이 들었다.


그런데 아들은 얻어가진 프라모델을 만지작거리며

그냥 "네에.." 한 마디하고 만다.


결국 긴.. 긴.. 또 한 번의 잔소리가 되었을 뿐인 것 같다.


야구장에 가서 직관을 할 때 우리 팀이 초반에 대량득점을 했을때의

그 마음의 여유로움과 기쁨이 있기도 했지만

이왕 돈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심심하게 경기가 끝나나하며 아쉬운 마음이 있었던 기억도 있어서

여유로운 경기, 치열한 경기(마지막엔 이겨야 되긴 하는데..)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터라

아들이 어떤 인생을 살게 되더라도 1호 팬으로 늘 응원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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