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긴긴밤>을 봤다. 맞다. 루리 작가의 소설이 원작이다. 코끼리들에게 키워진 코뿔소가 펭귄을 키우는 이야기. 이 문장은 진짜지만, 또 너무 빈약하다는 점에서 가짜다. 소설이 판소리가 됐다. 이 역시 진짜지만, 연극과 음악적 요소가 크다는 점에서 또 가짜다.
뭐가 됐든 둘 다 훌륭하다. 소설은 소설이라서, 무대공연은 공연이라서 좋다. 공연을 보는 내내 푸르고 파랗고 노란 조명이 만든 깊은 자연, 인간의 몸이 빚어낸 동물들의 접촉, 각종 리듬과 장단의 노래에 연신 마음을 빼앗겠다. 누가 봐도 ‘여기가 클라이맥스야’라고 하는 노든의 뿔과 펭귄의 부리가 닿는
장면에는 그야말로 버틸 힘 없이 무너졌다.
긴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산초와 재회하는 순간 알았다. 노든과 펭귄의 순간이 나에겐 매일 있구나. 만나면 반갑다고 부딪히는 나의 손과 산초의 발, 산초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팔 안쪽에 닿는 촉촉한 코, 잠들 때면 종아리에 닿는 곡선의 몸. 소설을 읽었을 때는 어떻게든 혼자 가야만 하는 그 길 앞에 닥칠 외로움이 버겁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는 함께 했던 시간의 다정함이 더 기억에 남는다. 소설과는 다르게 눈앞에 존재하는 아티스트들의 행위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제 산초를 통해 그 물리적인 다정함의 감각을 알게 되어서라고도 생각한다.
누나는 센치해졌지만, 사실 강아지는 요즘 갑자기 열심히 일하는 누나에게 파괴로 시위하고 있다…
파괴왕의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