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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Feb 29. 2024

새로운 습관의 탄생

느림의 속도

아침에 일어나면 필사한다. NHK 뉴스의 한 꼭지를 정해서 기사 전문을 필사하고 애매하게 기억하는 단어를 찾아보고, 그리고서 곧바로 하루 30분 독서 후 두 번째 필사도 마저 한다. 왜 필사를 시작하게 되었을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급할 게 없는 일상에서도 뭐든지 성급하게 진행하다가 일을 망치는 습관 때문이었다.


한 글자도 실수 없이 깨끗한 필사본을 만들어 인증사진을 올리려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차근차근 천천히 써야 하니깐 마음만 급하게 달리는 습관을 누르는 훈련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년 9월 초에 시작한 필사 릴레이가 보름 만에 끝나자 아쉬운 마음에 곧이어 다른 그룹에 가입했다. 몇 달 동안 의도적으로 느리고, 침착하게 움직이는 습관을 들이려는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필사한 후에 사진으로 인증하는 번잡한 과정을 굳이 자처하는 까닭은 혼자라면 흐트러지기 쉬운 나약한 의지를 보완하기 위함이다. 함께라면 동력을 얻고 조금은 압박도 느끼며, 가끔 서로의 글에 대한 의견과 감상도 나눌 수 있는, 아주 편안하고 느슨한 연대가 좋았다. 게다가 매일 진행되는 미션은 다소(때로는 매우)귀찮지만, 항상성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다져온 습성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았다. 3주 동안 열과 성의를 다하면 새로운 습관이 예전의 구습을 지울 것이라 기대했는데, 가장 여유 있고 조용한 시간에도 실체 없는 것에 쫓겨 서두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스크류바'를 쓸 때면 세 번째 글자의 모음인 'ㅠ'는 성급하게 두 번째 글자의 자음 'ㅋ'과 만나서 '스큐류바'가 되어버리고, 감상은 ‘갓상’이 되고 미술관은 ‘밋술관’이 되기도 했다. 한자는 이런 경우가 더 잦아서 앞 글자의 부수와 뒷글자의 부수가 결합하여 이상한 글자가 탄생하는 일이 많았다.


처음에 오류를 발견했을 때는 공책의 다른 빈 곳을 열고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했다. 제목부터 틀린 날이라면 얼마든지 다시 시작했지만, 두세 줄 이상 진행된 상황에서 다시 시작이란 너무나 귀찮은 일이었다. 왠지 수정액으로 지울 정도로 정성을 들일 필요는 없다는 오만한 생각도 있었다. 이때부터 돼지 꼬리로 빼고 브이 사이에 부족한 것을 더해서 누더기 같은 필사본을 완성해 버리는 꼼수가 등장했다. 손가락은 편안해졌지만, 성급한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이 되지 못해 찜찜함은 남았다.


같은 이유로 커피 원두를 직접 갈아 커피 내리기를 해보았다. 때마침 유효기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원두의 존재도 한몫했지만, 문득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속 카페는 도심과 떨어진 숲속에 있었고 한쪽 면은 큰 창으로 되어있어 바깥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창가 자리에 한 명씩 앉아 계절마다 변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각자의 수동 그라인드를 돌린다. 사람들은 서걱서걱 원두가 갈리는 소리와 향을 먼저 음미했다. 다음으로 커피 가루가 갈색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을 바라보다가 여과지를 통과하며 천천히 똑똑 떨어지면 커피 방울을 모아 마셨다. 드라마의 내용은 다 지워졌지만, 이 장면만은 뇌리에 남았다. 그들은 자신이 고른 원두를 직접 갈고 내리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평안하게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수동 원두 그라인더는 오랜 세월 동안 잔뜩 먼지를 덮고 싱크대 한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몇 번의 이사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기구에서는 세월의 더께가 그대로 느껴졌다. 화려하지 않은 단순한 모양새의 원두 그라인더는 본래의 기능보다는 왠지 바라보면 커피향과 함께 여유를 연상시키는 장식용에 가까웠다.

  

쌓인 먼지를 닦아낸 후 원두를 집어넣고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연필이 깎이는 소리같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순조롭게 나기 시작했다. 하단에 달린 서랍에 어느 정도 쌓인 분말을 모카포트에 채우고 또다시 갈기 시작하는데 드르륵드르륵 힘겹게 돌아가다가 잠시 멈춤, 힘을 다해 다시 돌리다 보니 땀이 난다. 한겨울인데, 실내에서도 양말에 조끼까지 입어야 할 정도로 추운 날인데 원두 갈다가 땀이 나다니...... 그러니깐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성미에 안 맞는 걸까?!


주방 창문을 열고 차가운 외기를 맞으며 마지막 몇 바퀴를 더 돌린 후에야 한 잔의 원두 가루가 확보되었다.  의자에 앉아서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쉽게도 쓱쓱 손잡이를 돌리던 드라마 속 장면에 의구심을 잔뜩 품으면서도 애써 외면해 보았다. 하지만 원두를 거의 소진해 가던 어느 날, 휘휘 성급하게 빠른 속도로 돌리던 나무 손잡이는 떨어져 버렸다. 쇠막대와 나무 손잡이를 연결하던 나사가 탈출해 버린 것이다. 커피 한잔을 마시기위해 충분한 시간을 보내겠다는 의지가 꺾이는 순간이었다. 헛웃음을 지으며 떨어진 부분을 긴 나사로 대충 연결해서 불안하게 붙어있는 손잡이를 겨우 부여잡고 남은 원두를 모두 한꺼번에 갈아버렸다. 


사실 그전부터 매일 하루분의 원두를 가는 일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곤 했다. 그래서 다음날 것도 미리 갈아놓는 날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전부 다 갈아서 통에 담아둘지 생각하기도 했다. 드라마에서처럼 한 잔을 만들기 위해 다소 긴 시간을 들이는 정성과 느긋함을 즐기자는 마음이 흐릿해지던 바로 그 시점에 공교롭게도 수동그라인더의 나사가 빠졌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루 상태인 원두를 사들였다. 모카포트에 맞는 크기로 갈려 배송된 원두는 왠지 더 구수하고 진한 게 맛났다. 잘 맞는 원두를 골라서일지도 모르지만, 본인에게는 이 정도의 ‘느림’이 지금으로서는 적당했는지도 모른다.




어깨와 가슴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를 한 채로 하차하려고 낑낑대거나, 싱크대에서 그릇을 꺼내면서 머리를 넣은 채로 문짝을 닫는 등 어이없게도 뭔가에 쫓겨서 서두르다 도리어 몸이 피곤해지는 일들이 부쩍 늘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어수룩해지는 건지 마음만 급해지는 건지 알 수는 없다. 그래서 굳이 느리게 해야만 되는 일들을 좇아 시도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굳이 필사를, 굳이 커피 내리기 같은 짓을 해서 과연 느림의 미학을 알아차리게 되었을까? 그러한 시도는 어떻게 생활을 변화시켰을까?


효과를 보기는커녕 오히려 본래 자신이 가진 기질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지만, 필사와 커피 내리기를 하는 동안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시나브로 성취하는 것도 생겼고 그런 이유로 이 두 가지 일상을 지속하기로 했다. 부담 없이 사소한 일을 매일 성실하게 해내는 것이 지금 자신에게 딱 필요한 일상의 퍼즐이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시간 동안에도 허둥대면서 서두르거나 괴발개발 글씨를 휘갈기더라도 뉴스 한 꼭지의 처음과 끝을 찬찬히 읽어내고 커피 가루 향기를 맡고 추출하는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작은 충만함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주 조금은 느려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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