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실존주의의 회복을 위하여
*이 글은 GPT와의 대화와 협업을 바탕으로 완성되었다.
들어가며 | 자유를 ‘명령받는’ 사람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자유를 외쳐왔다. 그러나 그 자유는 언제나 허락의 형태로 주어졌다. 우리는 독립을 선포했지만, 그 독립의 조건은 언제나 누군가의 승인 속에 있었다. 정치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일상의 감정 구조 속에서도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정해진 선택지를 택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자유는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안전하게 승인받는 기술이 되었다.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전시작전권 없음’은 바로 그 상태를 드러내는 은유다.
전시작전권은 군사 주권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존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국가가 전쟁의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제도의 결여가 아니라 결정 능력의 외주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정치적 주체로서뿐 아니라, 실존적 인간으로서 이 외주화의 습관 속에서 살아왔다.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안전을 얻고, 책임을 위임함으로써 자유를 확보하려 한다. 이 모순된 구조는 개인의 내면에서 사회의 질서로, 다시 사회의 감정 구조로 확장되어 오늘날 한국인의 실존적 풍경을 형성한다.
이 글은 “전시작전권 없음”을 단지 국가적 종속의 상징으로 읽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정신적 구조, 즉 결정의 결여가 제도와 감정의 문법으로 제도화된 상태를 뜻한다. 우리는 자유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 자유의 전제인 결정의 권리를 타인에게, 체제에게, 집단의 도덕적 합의에게 위임한 채 살아간다. 그 결과 사회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안정된 질서가 되었다.
문제는 이 ‘결정의 부재’가 더 이상 결함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미덕처럼, 합리처럼, 혹은 생존 전략처럼 여겨진다. 정치권은 결정을 외면한 채 책임의 전가를 반복하고, 시민들은 그 결여를 “현실 감각”이라 부른다. 감정의 수준에서도 이 구조는 작동한다. 세대 갈등, 성별 대립, 이념의 분열은 모두 결정의 부재가 만든 대리적 전쟁이다. 서로 결정하지 못한 존재들이 서로를 원인으로 오해하며 싸우는 구조 — 그것이 ‘을과 을의 전쟁’, ‘병과 병의 분열’의 본질이다.
‘전시작전권 없음’이라는 은유의 힘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지 종속의 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현실이 어떻게 분열의 감정으로 번역되고, 왜곡된 자각으로 소비되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결정할 수 없는 사회는 늘 분열을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분열은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가장 효율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미워함으로써 결정의 책임을 유예하고, 분노함으로써 스스로를 행위자라 착각한다. 그리하여 사회는 끊임없이 격렬해지지만,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다.
이 글은 이 모순을 실존의 차원에서 탐구한다.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감정의 과열, 그리고 결정의 회피는 모두 하나의 구조 속에 있다. 그것은 국가의 전시작전권이 부재한 상태와 정확히 닮아 있다. 우리는 자유를 외치지만, 그 자유는 누군가의 명령을 전제한다. 우리는 독립을 말하지만, 그 독립은 승인받아야만 가능하다. 이 모순의 정점에서 한국적 실존주의가 시작된다. 그것은 자유를 찬양하는 철학이 아니라, 결정하지 않음의 습관을 인식하려는 철학이다.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나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제도와 관습이 만들어낸 존재의 방식이다. 그러나 실존의 회복은 그 인식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타율의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비로소 그는 결정을 되찾을 수 있다. 이 글이 탐구하려는 것은 바로 그 ‘결정의 복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왜,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의 전시작전권을 포기해 왔는가. 그리고 그 포기가 어떻게 감정의 분열로, 사회의 모순으로, 실존의 피로로 이어졌는가. 그 질문이 지금, 한국적 실존주의의 출발점이 된다.
1장 | 복종의 제도화 ― 결정의 외주화로서의 근대
한국의 근대는 독립의 역사로 기록되지만, 실제로는 복종의 기술이 세련되게 제도화된 과정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기보다는 결정된 구조 안에서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그 효율은 생존의 조건이었고, 복종은 합리로 위장되었다. “전시작전권 없음”은 단지 군사 주권의 문제를 넘어서, 이 복종의 기술이 사회 전체의 언어가 된 상태를 상징한다.
1945년의 해방은 자유의 서막이 아니라, 결정권의 공백으로 시작되었다. 일본 제국의 붕괴로 맞이한 해방은 자율적 결단이 아니라 외부의 결과였고, 새로운 체제의 설계는 곧 미군정의 관리 아래서 진행되었다. 한국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지 않은 국가’였다. 국가가 스스로를 결정하지 못하는 그 구조는 국민의 실존에도 전이되었다. 자유는 결단이 아니라 안정의 문제로 이해되었고, 결정은 위험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 결과 한국 사회의 근대적 주체는 ‘결정하지 않음’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는 존재로 성장했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의 도덕으로 복종을 재정의했다. 반공은 이념이 아니라 존재의 위계질서였다. “빨갱이”는 단순히 다른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존재할 수 없는 자를 의미했다. 결정의 권리를 가진 주체는 국가였고, 국민은 그 결정의 윤리적 수용자로 남았다. 자유는 체제의 언어 속에서만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단어가 되었고, 복종은 생존의 조건으로 내면화되었다. 하이데거가 말한 ‘비본래적 실존’의 상태—타인의 규범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존재—가 한국의 현실적 생존 전략이 되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복종을 폭력에서 동의로 바꾸었다.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국민은 국가의 명령을 자신의 목표로 받아들였다. 복종은 더 이상 강제가 아니라 자기 동의의 행위가 되었다. 인간은 체제의 명령을 내면화함으로써 자유를 느꼈다. 사르트르가 ‘악한 신앙’이라 부른 그 상태, 즉 자유의 불안을 견디지 못해 규범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가 일상의 윤리로 제도화되었다. 스스로를 체제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곧 책임이고 성숙이라 여겨졌다. 복종은 체제의 폭력이 아니라 자기 이해의 언어로 변했다.
민주화 이후의 자유는 제도의 문제로 환원되었다. 투표와 발언, 권리와 절차는 확보되었지만, 결정의 감각은 회복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유를 가졌지만, 어떻게 사용할지를 두려워했다. 국가의 명령이 사라진 자리에 ‘옳음의 압박’이 들어섰다. 자유는 책임의 언어에서 도덕의 언어로 이동했고, 정치적 올바름은 새로운 복종의 형식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폭력에 복종하지 않지만, 대신 합리와 도덕의 이름으로 복종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완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이제 한국 사회의 자유는 승인 절차의 문제로 남았다. 결단의 행위가 아니라, 결단이 승인되는 과정이 중요해졌다. 정치인은 여론의 승인 없이는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시민은 “틀리지 않는 판단”만을 내리려 한다. 판단의 옳음보다 승인받는 안전함이 우선된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한다고 믿지만, 그 결정의 언어와 구조는 이미 외부의 체계에 의해 설정되어 있다. 전시작전권 없는 국가는 전쟁의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지만, 그 구조는 이제 사회의 기본 문법이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내면적 습관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결정을 두려워한다. 결정은 실패를 낳고, 실패는 책임을 요구하며, 책임은 불안을 동반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안을 줄이기 위해 결정을 위임한다. 위임은 안정을 낳고, 안정은 다시 복종을 낳는다. 이 순환의 구조가 한국적 근대의 실질적 질서였다. ‘결정하지 않는 자유’가 사회적 정상성으로 굳어지면서, 인간의 실존은 점점 더 타인의 질서 속에서 안도하는 습관으로 정착되었다.
‘복종의 제도화’는 결국 한국적 실존의 첫 번째 구조다. 국가의 전시작전권이 부재한 것은 물리적 현실이지만, 그 부재를 닮은 감정의 문법—결정의 위임, 승인받는 자유, 책임의 회피—은 사회의 심층 구조로 자리 잡았다. 한국 사회의 인간은 복종을 강요받지 않는다. 대신 복종의 필요성을 스스로 납득하고 살아간다. 그것이야말로 근대가 남긴 가장 완벽한 통치의 형식이며, 실존의 가장 은밀한 속박이다.
2장 | 분열의 감정정치 ― 을과 을, 병과 병의 전쟁
복종이 제도적 수준에서 내면으로 이식된 뒤, 사회는 겉으로는 자유로워졌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한 형태의 복종 구조를 발명했다. 명령이 사라진 자리에 감정이 들어섰고, 폭력 대신 혐오가 통치의 언어가 되었다.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명령받는 사회’가 아니라 ‘자극받는 사회’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믿지만, 그 자유는 분노와 혐오의 형태로 관리된다. 이 상태가 바로 ‘전시작전권 없음’이 감정의 구조로 옮겨간 모습이다.
한국의 갈등은 대부분 아래로 흐른다. 위를 향해야 할 분노가 옆으로 퍼지고, 을과 을이 서로를 공격한다. 세대 갈등, 성별 대립, 계급과 지역의 대치가 모두 같은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결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분열은 가장 손쉬운 활력의 대체물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행위자라 느끼기 위해 타인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 행위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분노는 발산되지만 구조는 남고, 구조는 남기 위해 분노를 필요로 한다. 전시작전권 없는 사회는 바로 이 감정의 순환 위에서 유지된다.
세대 간의 대립은 단순한 가치관의 차이가 아니라, 자유의 문법이 충돌하는 현상이다. 4050은 자유를 책임과 의무의 언어로 배웠고, 2030은 자유를 선택과 가능성의 언어로 배웠다. 전자는 결정을 국가나 제도의 차원에서 외주화해왔고, 후자는 그것을 자기 내부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4050은 ‘제도 안의 복종’을, 2030은 ‘자기 내부의 복종’을 수행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복종했기 때문에, 서로의 복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결과 4050은 2030을 ‘무책임한 세대’로, 2030은 4050을 ‘위선의 세대’로 부른다. 사실 그들은 자유의 다른 형태를 살고 있을 뿐, 같은 구조에 묶여 있다.
성별 갈등 역시 결정의 부재가 낳은 감정의 전쟁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 자신이 사회 구조 속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느낀다. 남성은 공정의 불안을, 여성은 안전의 불안을 안고 있다. 그러나 두 불안은 공통의 구조—‘결정할 수 없는 삶의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같은 을이다. 하지만 사회는 이 공통의 구조를 감추기 위해 남녀의 대립을 부추긴다. 정치와 미디어는 “피해의 경쟁”이라는 형태로 감정을 조작한다. “그들이 더 특혜를 받았다”는 짧은 문장은 복잡한 구조의 원인을 단순한 적대감으로 치환시킨다. 그 결과 남녀의 분열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체제가 지속되는 정당성을 얻는다.
계급과 지역의 대립 또한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청년 하층과 중년 중산층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생존의 불안을 느낀다. 청년은 “노력해도 오를 수 없다”고 말하고, 중년은 “우리는 노력으로 올라왔다”고 답한다. 그 둘 다 틀리지 않다. 그러나 서로의 불안을 다른 세대의 도덕적 결함으로 오독할 때, 구조는 또 한 번 안정된다. 지역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비수도권은 “우리가 버려졌다”고 느끼고, 수도권은 “우리가 대신 끌고 간다”고 믿는다. 중심과 주변은 서로 다른 상처를 품은 채,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려 애쓴다. 결국 이 모든 분열은 존재의 승인 욕망이라는 한 가지 감정으로 수렴된다. 모두가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회. 그 안에서 분열은 생존의 언어로, 복종은 안정의 기술로 기능한다.
이념의 대립은 더욱 정교하다. 진보와 보수는 신념의 차이가 아니라 감정의 정체성이다. 사람들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의 귀속을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나는 진보이기 때문에 옳다”, “나는 보수이기 때문에 책임감 있다.” 이 문장은 논리가 아니라 존재의 안정감을 보장한다. 정치 세력은 이 감정을 가장 효율적인 통치의 자원으로 활용한다. 분노와 확신이 유지되는 한, 구조는 흔들리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비난할수록, 그 대립의 구도 자체가 체제를 견고하게 만든다. 이것이 ‘전시작전권 없음’의 사회적 역설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싸우지만, 그 싸움의 규칙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결국 이 모든 갈등의 공통점은 ‘결정할 수 없는 사회가 분열을 통해 자신을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결정을 대신하는 감정은 쾌감과 정당성을 준다. 분노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행위자로 느낀다. 그러나 그 분노는 결정을 대체할 뿐,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감정의 폭주는 결정의 결여를 가리기 위한 장막이다. 이 구조 속에서 인간은 자유를 외치며 복종하고, 복종 속에서 자유를 체험한다. ‘전시작전권 없음’은 이 상태의 이름이다.
결정의 외주화가 제도에서 감정으로 옮겨간 사회에서, 복종은 더 이상 억압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경제학이자 사회적 습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분열을 수행한다. 분열은 이제 체제의 안정 장치이며, 감정은 그 장치의 연료다. 전시작전권 없는 인간은 타자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분노의 순간마다 자신이 선택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선택은 이미 설계된 결정의 부재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실존주의의 두 번째 구조다. 제도적 복종이 감정의 분열로 변이된 상태. 우리는 더 이상 복종하지 않는다—대신 분열한다. 복종의 시대가 끝나면, 감정의 시대가 온다. 그러나 그 감정의 자유는 여전히 타율의 언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여전히 전시작전권이 없는 인간들이다. 단지 총 대신 감정을 쥐었을 뿐이다.
3장 | 모순의 극점 ― 군비경쟁하는 사회, 결정하지 못하는 국가
국가의 몸은 점점 더 단단해지는데, 정신은 점점 더 흔들리고 있다. 국가는 끊임없이 위기를 말하고, 국민은 그 위기에 응답하듯 결집한다. 그러나 그 결집은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불안을 관리하는 기술이자, 결정하지 않음의 집단적 형식이다. 전시작전권이 없는 국가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지만, 그 결핍을 숨기기 위해 강해지는 척을 한다. 그것이 바로 ‘군비경쟁하는 사회, 결정하지 못하는 국가’라는 역설의 형태다.
냉전 이후 한국의 국가는 언제나 ‘준(準)전시 상태’를 유지해왔다. 실제의 전쟁보다 ‘전쟁의 가능성’이 더 중요한 사회였다. 그 가능성은 언제나 결집을 요구했다. “지금은 뭉쳐야 한다”, “결정을 미뤄야 한다”, “안정이 먼저다.” 이런 언어들이 오랜 시간 동안 정치의 중심 문법으로 작동했다. 결정의 부재는 위기의 논리 속에서 언제나 정당화되었다. 전시작전권이 없다는 사실은 더 이상 결함이 아니라, 국민의 단결을 상징하는 수사가 되었다. 결정을 미루는 것은 생존의 지혜가 되었고, 타율은 애국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이 구조는 시간이 흐르며 국가적 습관이 되었다. 사회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결정의 책임을 회피하는 집단적 기술로 발전했다. 정치권은 위기를 조율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시민은 위기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위기의 연속은 우리에게 결정을 유예할 명분을 제공한다. 경제적 위기, 안보 위기, 세대 위기, 젠더 위기… 우리는 끊임없이 “결정의 순간”을 미루기 위해 위기를 발명한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결정하지 않음의 상태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가장 고도화된 형태의 사회가 되었다.
이 사회의 역설은 강박적 결집의 풍경 속에서 가장 선명히 드러난다. 집단이 외부의 위협을 감지할수록, 개인의 결정은 더 무력화된다. 사람들은 “국가를 위해”, “가족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라는 말로 스스로를 규율한다. 그러나 그 규율의 내부에는 아무 결정도 없다. 그것은 단지 이미 정해진 선택지를 반복 확인하는 행위다. 개인이 자기 결정을 유보한 만큼, 국가는 그 유보를 결집의 증거로 삼는다. 우리는 결단 대신 동의를 내놓고, 결의를 대신 충성을 말한다.
이때 전체주의적 분위기는 결코 폭력적 명령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교하게 구성된 감정의 동조를 통해 작동한다. ‘두려움의 공유’는 ‘판단의 유예’를 낳고, ‘판단의 유예’는 다시 ‘결집의 쾌감’을 낳는다. 우리는 같은 불안을 느끼며 하나의 공동체임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결속은 언제나 타자를 상정해야 유지된다. 외부의 적, 내부의 반대자, 다른 세대와 다른 성별—그 모두가 결집의 에너지원이다. 이 상태에서 사회는 전쟁을 하지 않으면서도 전시체제를 유지한다. 전쟁이 현실이 되면 결단이 필요하지만, 전쟁의 가능성만 있는 사회는 끝없이 결집만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모순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재현된다. 경제는 경쟁이라는 이름의 군비경쟁을 벌이고, 교육은 불안의 사다리를 오르며, 미디어는 감정의 위기를 매일 재생산한다. 모든 것은 위기의 언어로 쓰이고, 모든 결정은 위기의 뒤로 밀린다. 그 사이 사회는 점점 더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전시작전권이 없는 국가는 전쟁의 순간을 선택하지 못하지만, 바로 그 결여가 오히려 안정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그 안정 속에서 안도한다.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우리를 묶어준다.
이것이 ‘모순의 극점’이다. 강해질수록 스스로를 결정하지 못하는 사회. 자율을 말할수록 타율의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 국가적 결집이 절정에 이른 순간, 결정의 가능성은 완전히 소멸한다. 외세의 의존은 군사적 차원을 넘어, 사고의 구조와 감정의 문법으로 내면화된다.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집단적 신념이야말로, 전시작전권 부재의 진정한 의미다. 그것은 물리적 종속이 아니라 정신적 위임의 체계다.
한국 사회는 지금 이 모순의 정점 위에 서 있다. 국가의 힘은 커졌고, 개인의 결단은 사라졌다. 전시작전권 없음은 제도의 결함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은유다.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결정하지 않음’이라는 집단적 습관 속에서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전시작전권 없는 국가는 단지 군사적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실존적 상태다. 결정의 부재가 불안을 줄이고, 복종이 안정을 주며, 결집이 자율의 대체물이 되는 사회—그것이 바로 한국적 근대가 도달한 모순의 극점이다.
4장 | 존재의 귀환 ― 타율의 인식에서 시작되는 자유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자유의 결핍이 아니라, 자유의 오해였다. 우리는 자유를 소유의 개념으로, 선택의 폭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진짜 자유는 선택의 다양성이 아니라, 결정의 주체성에서 비롯된다. 전시작전권이 없는 사회는 바로 그 주체성을 결여한 사회다. 자유를 선언하면서도, 그 자유를 행사할 순간마다 타자의 눈을 본다. 한국 사회의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원하지만, 자유의 결과를 감당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유의 감각은 타율의 언어로만 표현된다.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 “국가를 위해, 가족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그렇게 자유는 늘 승인과 도덕의 감시 속에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스스로를 던짐으로써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의 인간은 던져지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되었다. 스스로 세계 속으로 뛰어드는 대신, 세계가 자신을 던져주기를 바라본다. 전시작전권이 없는 국가는 타자의 명령을 기다리듯, 우리는 타인의 판단을 기다린다. 그것이 사회적 예의이자 생존의 지혜가 되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상태는 실존의 정지다. 아무리 분노하고 싸워도, 결정이 타자에게 위임된 한,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의 삶을 지휘하지 못한다. 이 무력한 자유 속에서 우리는 책임 없는 분노, 선택 없는 감정의 자유를 수행한다.
그렇다면 실존의 회복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그것은 저항이 아니라 인식에서 시작된다. 타율을 거부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자각해야 한다. “나는 타율의 존재로 길들여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유의 새로운 감각이 열린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형벌이란 바로 이 깨달음이다. 인간은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갖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음 또한 하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전시작전권이 없는 사회에서 실존적 각성은 “결정하지 않음의 책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복종을 끝내는 것은 반항이 아니라 자각이다. 자각은 타율의 구조를 폭로하고, 그 폭로는 내면의 질서를 다시 쓰게 만든다.
자각의 자유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정권을 되찾는 내면의 행위다. 그것은 체제에 맞서는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일상적 결단의 복원이다. 한국 사회의 진짜 독립은 군사적, 제도적 독립이 아니라 결정적 독립이다. 우리가 전시작전권을 회복해야 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로서다. 누군가의 승인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행위, 그 불안을 견디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실존의 출발이다. 인간은 타율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그 타율을 인식하는 순간 자유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때 자유는 더 이상 거창한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사소한 결단, 자신의 삶을 직접 결정하는 작은 행위들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부재를 탓하면서도, 스스로의 삶에서는 여전히 결정을 미룬다. “조금 더 기다리자”, “상황을 보자”, “괜히 나섰다가 손해를 볼 수도 있잖아.” 이런 문장들이야말로 전시작전권 없는 인간의 일상적 언어다. 그러나 바로 그 언어를 자각하는 순간, 실존은 다시 깨어난다. 자유란 완벽한 독립이 아니라, 결정을 미루는 습관을 멈추는 일이다.
한국적 실존주의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지점은 이 깨달음에 있다. 자유는 타율의 반대가 아니다. 자유는 타율의 인식을 통해 비로소 드러난다. 복종의 구조를 직시하는 인간은 이미 그 복종을 넘어서는 존재다. 전시작전권이 없는 인간이라도, 자신의 결정이 외부에 위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는 다시 스스로의 지휘관이 된다. 자유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식은 스스로 일어나는 일이다.
결국 실존의 귀환이란, 국가의 주권 회복이 아니라 인간의 주권 회복이다. 그것은 타율의 체제 속에서도 자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결정하지 않음’을 더 이상 안락으로 여기지 않는 용기, 그리고 책임의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숙이다. 한국적 실존주의는 이 새로운 윤리를 요청한다. 자유를 찬양하는 철학이 아니라, 결정의 윤리, 자각의 윤리다. 복종의 시대가 끝나고 감정의 시대가 지나간 뒤, 우리는 마침내 다시 묻는다. “나는 스스로를 지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전시작전권 없는 존재가 아니다.
맺음말 | 결정을 되찾는 일
한국 사회의 가장 오래된 결핍은 자유가 아니라 결정이다. 우리는 자유를 원했지만, 자유는 언제나 누군가의 승인 속에서만 가능했다. 결정하지 않음은 생존의 기술이 되었고, 복종은 질서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전시작전권 없음은 단지 군사적 현실이 아니라, 이 사회의 구조적 정서를 압축한 문장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지휘하지 못하는 국가의 초상이며, 동시에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한 세기 가까운 근대의 시간 동안 우리는 ‘결정하지 않음’의 편안함 속에서 살아왔다. 해방의 기쁨은 외부의 패망이 가져왔고, 민주주의의 완성은 제도적 틀 속에서 주어졌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힘의 중개 아래에서만 자유를 배웠다. 그 결과 인간의 실존은 타율을 거부하기보다, 타율 속에서 안심하는 습관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그 습관은 이제 사회 전체를 마비시키고 있다. 정치의 결단은 여론의 눈치를 보고, 시민의 판단은 집단의 시선을 의식하며, 젊은 세대의 선택은 체제의 매뉴얼을 따른다. 모두가 움직이지만, 아무도 결정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다시 결정을 배워야 한다. 결정이란 옳음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다. 자유란 무제한의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하는 능력이다. 전시작전권 없는 사회에서 자유를 회복한다는 것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감각을 되찾는 일이다. 그것은 제도 개혁이나 외교적 독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윤리적 전환이다. “나는 스스로 선택했다”는 한 문장을 다시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미 새로운 실존의 문턱에 서게 된다.
결정의 회복은 저항의 구호보다 조용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타율을 인식하는 일, 복종의 구조를 자각하는 일, 그리고 그 자각의 순간을 견디는 일. 실존의 자유는 체제와 싸우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체제 속에서 어떻게 복종해왔는지를 직시하는 데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로워질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했지만, 한국의 인간은 그 운명을 오랫동안 타자에게 위탁해왔다. 그러나 위탁의 역사는 끝날 수 있다. 그것은 한 번의 거대한 혁명이 아니라, 작고 일상적인 결단의 누적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정은 늘 불안을 동반한다. 그 불안을 견디는 용기가야말로 실존의 가장 인간적인 형태다. 우리는 타인의 승인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의 불안을 감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롭다. 전시작전권이 없는 인간이라도, 자신이 결정을 미뤄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이미 결정을 시작한 것이다. 자유란 타율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타율을 인식하면서도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지속적 결단의 운동이다.
한국적 실존주의는 결국 이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자유는 결정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결단은 인식을 통해서만 시작된다.
우리가 진짜로 회복해야 할 것은 전시작전권이 아니라 결정의 감각이다. 자신의 삶을 직접 지휘하는 능력, 타인의 승인 없이 책임을 지는 용기, 그리고 결정의 불안을 견디는 품격.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오랜 복종의 습관 끝에서 다시 배워야 할 자유의 문법이다. 그 문법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전시작전권이 없는 인간들’이 아니다. 우리는 비로소 결정하는 인간, 다시 말해 자기 실존의 지휘관으로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