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엔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거리에는 경쾌한 캐롤이 흘러 나오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자기 갈 길 바쁘다. 올해 크리스마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코로나가 두렵더라도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밥 한 끼 먹기 힘들었고, 어딜 가든 사람 많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종교를 떠나 크리스마스는 기쁜 날이다. 평일이라면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며, 평소에는 먹지 못하는 고급 요리를 먹기도 한다. 누군가는 연인과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모름지기 크리스마스지 않은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날은 예수가 태어난 날, 다시 말해 예수의 생일이다. 기쁜 날리 여겨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 사람이 태어난 날이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탄생은 언제나 축하를 받는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은 조금 의미가 다르다. 기독교 전통에서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한다. 여러 구약 성경을 근거로 그의 탄생은 예견된 일이며, 그가 태어난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 위함이다.
성경을 조금만 살펴 보더라도 크리스마스의 의의가 전혀 달라진다. 물론 교회는 이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매주 사도신경을 외우며,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사하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크리스마스를 그저 기쁜 날이라고만 이야기할까? 많은 교회에서 이브 날에는 전야제를 한다. 아이들은 연극을 하고 찬양을 부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말하듯 예수의 죽음은 예견되었다.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났다. 그렇다면 그의 탄생은 축하받아 마땅한가? 크리스마스를 기쁜 날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일말의 양심이 크리스마스를 기쁜 날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종종 대속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의 죄를 예수가 대신 지고 죽음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 사실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에게 미안해하는 사람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수는 분명 죽음을 두려워 했으며, 피할 수 있다면 십자가 형벌을 피하고 싶었다. 예수의 희생은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우리가 그에게 가져야 하는 감정은 과연 감사함 뿐일까? 죽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존재가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게 다름 아닌 나 때문이라면, 우리가 느껴야 하는 감정이 기쁨이 맞을까?
예수는 종종 영웅에 비유된다. 그렇게 그의 행동이 굉장히 의로운 일로 여겨진다. 이따금씩 누군가의 희생은 '선'으로 기억되며, 희생되는 이는 '선'이라는 이름 하에 희생을 도맡는다. 남은 사람들은 당신 덕분에 모두가 살았다고 기뻐하며 감사한다. 희생이 선으로 포장되고 죽음이 대속으로 기억될 때, 인간은 결국 희생자에게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만일 그가 3일 째에 부활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의 죄가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잔인한 사건은, 부활과 대속이라는 이름으로 기가 막히게 포장된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한 생물이란 말인가.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느껴야 하는 감정은 진실로 기쁨일까? 그 날은 진실로 기쁜 날인가? 구약 성서에 따르면 신은 인간에게 몇 번이나 기회를 주었다. 그때마다 기회를 걷어찬 건 다름 아닌 인간이다. 도저히 참지 못한 신은 마지막 수, 자신의 아들을 보내기로 했다. 성탄은 인간의 잔혹함이 뼈저리게 드러나는 날이며, 아버지가 기어코 자신의 자식을 죽이기 위해 낳는 처절한 날이다. 이런 날 우리가 해야 하는 게 고작 경쾌한 캐롤일까? 적어도 이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삶을 돌아 보며, 죽지 않아도 됐을 한 청년의 인생을 기려야 할 때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