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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o Apr 18. 2022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한참 수저 계급론이 유행하자 많은 이들이 본인의 힘든 삶을 토로했고, 대학교 입학 선물로 부모에게 노트북을 받았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해 억울하다는 친구가 부모님의 돈으로 토익 학원을 다닐 때, 나는 다음 학기 생활비를 위해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늘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렇다고 태생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가세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착실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이사를 다니는 빈도가 늘어났고, 평수도 점점 줄어 들었다. 


어머니는 단 돈 만 원이 없어 내게 문제집 한 권을 더 사 주지 못 했다. 그래서 나는 오답 정리까지 끝난 문제집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보았다. 가난하다고 해서 의기소침하거나 막연히 부모 탓을 하진 않았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부모의 탓을 한다고 해서 돈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그저 착실히 지금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인생에는 몇 번의 굴곡이 있었다. 가장 큰 고난은 어머니의 ‘조현병’이었다. 그 때도 나는 착실히 해야 할 일을 했기에 어떻게든 넘길 수 있었다. 군복무 중이던 나는 경찰과 함께 어머니를 찾아 가 강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부모를 정신병원에 집어 넣는 아들’이라며 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증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호전되었으며, 병원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퇴원을 했다.


인생이 제법 나쁘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서야 제대로 작동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복학하고는 공부도 나쁘지 않게 해서, 어쩌면 훌륭한 학자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여전히 없었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착실히 돈을 벌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1년 정도 일을 했다. 몸은 고되도 괜찮았다. 부족한 만큼 더욱 착실히 살면 그만이었다. 


물론 집에서 홀로 있을 어머니가 걱정 되었지만 나에게도 내 삶이 있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고 역사에 내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망상과 환청이 끊이질 않아 다시 입원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적당히 어머니를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 차곡차곡 쌓은 모든 것들이, 내 세상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울음 끝에 깨달았다. 공부나 할 때가 아니었다.


신은 인간이 견딜 만큼의 고난만 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신은 나를 굉장히 과대평가했다. 어머니가 다시 병원에 들어간 이후로 내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다 끝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잠을 자기 위해 누우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한 바탕 무너지고 나면 내가 무너질 것 같다는 느낌이 찾아왔다. 내가 사라질까 불안하고, 원인 모를 무언가에 공포를 느꼈다. 몇 번이나 숨을 헐떡이고 흐느끼기를 반복하고 나면, 진이 다 빠진 채로 지쳐 잠이 들었다.


깨어 있는 시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상이 다 끝났다는 생각 때문에 일도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종종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거나, 숨이 잘 쉬어지지 않기도 했다. 처음에는 체력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마음의 신호였다. 사람이 많은 곳을 갈 때마다 호흡이 거칠어졌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아침에 눈을 떴는데도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헛구역질과 함께 온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내가 벌을 받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보통 벌에는 할당량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 순간이 벌이기를 바랐다. 어서 내 할당량을 채우고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무엇에 대한 형벌인지, 내 죄가 무엇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있지도 않은 죄를 찾으면 기분이 더욱 울적해졌기 때문이다.


결국은 벌도 뭣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아팠을 뿐이다. 세상이 무너진 것 또한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집이 가난했고, 어머니는 정신 병원에 입원 중이다. 평범한 이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단할 것도 없다. 늘 그렇듯 오늘을 착실하게 살아내면 그만이다. 도저히 착실할 수 없다면 쉬어 가도 괜찮다. 착실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내 인생은 무너지지 않았다. 또 무너졌으면 어떤가. 슬퍼할 만큼 슬퍼하고, 아쉬워할 만큼 아쉬워하고 새로 쌓으면 그만이다. 다시 오늘을 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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