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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o Sep 24. 2022

파도는 공평하다

이직한지 일주일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빌어먹을 공황 때문이었다. 숨은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세상이 빙글 돌았다. 머리는 어떠한 사고도 허락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의 모든 활동이 멈췄다. 밤마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날 그토록 괴롭히던 건 전 직장에서의 해고처리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음을 자부했기에 결과를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운 좋게 일을 바로 구했지만 마음의 상처가 가시지 않아서였을까. 이번엔 내 손으로 일자리를 벅차고 나왔다. 


1-2주 정도는 울기만 했다. 밖에도 나가지 못한 채 집안에서만 생활했다. 하루하루 메말라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여자친구가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오기를 권했다. 모아 놓은 돈이 많지 않았기에 그마저도 주저했지만, 이내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렇게 집에만 있다가는 정말 스스로가 무너질 것같았기 때문이다. 여름이니 바다에 가고 싶었고, 바다는 모름지기 동해바다라는 생각에 강릉행 기차를 예매했다. 그 단순한 생각이 내 삶의 스위치를 다시 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강릉에 짐을 제일 먼저 풀고는 아르떼 뮤지엄에 갔다. 최근 미디어 아트에 관심이 생겼고, 지인에게 추천을 받은 곳이었다. 나는 전시관을 가득 채운 파도에 압도당했다. 눈 앞에 펼쳐진 파도는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듯했다. 사람의 기술의 발전은 참 놀라웠다. 이제는 자연마저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가상으로 펼쳐진 자연의 의미를 고민하게 됐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 영상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조품이었다. 제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고한들 그것은 결국 바다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바다의 모조품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야 할까? 


다음 날 찾아 간 진짜 바다에서 내 모든 물음은 사라졌다. 동해의 강력한 파도는 나를 압도시켰다. 모조품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감이었다. 정말 당장이라도 내가 바다에 삼켜질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으로 보이는 파도는 나를 해치지 못하지만, 눈 앞에 보인 파도 앞에 나는 한없이 무력했다. 파도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했다. 파도 한 방이면 모두 휩쓸려갈 존재들이다. 나를 그토록 괴롭게 했던 전직장의 상사도, 파도 한 방이면 고꾸라지는 나약한 존재다. 우리 모두가 자연 앞에서는 별 볼 일 없다. 그런 사람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할 이유도, 홀로 궁상이나 떨 이유도 없었다. 파도는 공평하다. 


파도의 모조품에 관한 물음도 해결이 됐다. 인간은 결국 자연을 갖고 싶어 한다.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저 거대한 파도를 소유하길 원한다. 그것이 너무 두렵고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동등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고, 더 나아가 자연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두렵기에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인간은 강력한 존재가 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정말 거대한 힘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기 때문이다. 수천억의 자산가도, 당장 취직을 해야 하는 20대 청년도 파도 앞에선 공평하다. 내게 너무 중요해보이는 고민도 파도 한 방이면 쓸어나갈 고민이다. 


무심코 떠난 여행에서 생각을 깊이 정리하고 왔다. 여행을 돌아온 후로도 여전히 힘들었지만 감정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공황 증세도 조금 괜찮아졌으며, 금세 일자리를 구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특별한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받는 부당함에 화가 나고, 나보다 잘난 사람들을 보면 깎아 내리곤 한다. 그러나 정말 거대한 존재 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파도 한 방이면 다 무너질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너무 힘주지 말자. 파도는 공평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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