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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소정 Jun 20. 2018

문학적 건망증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좋아한다. 대학생 시절 그를 좋아해서 시중에 번역되어 나온 책은 모두 사서 읽었고, 책장 한편엔 쥐스킨트 섹션을 만들어 놓았다. (내 독서 습관 중 하나, 마음에 드는 작가가 생기면 그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의 글은 시쳇말로 ‘쫄깃’하다. 처음 시작부터 끝까지 독자를 빨아들인다. 한 순간도 놓아주지 않는다. 그의 밀당에 휘둘리다 보면 순식간에 글의 결말이 다가와 있다. 결말은 늘 다소 황당하고, 유머러스하며, 예상 밖의 것이다. 그런데 글 한 편이라도 줄거리를 말해 달라치면?


“아무것도 모른다.”


책장 한 켠, 파트리크 쥐스킨트 섹션


‘심리 묘사’에 감탄해 마지않았던 <비둘기>, <콘트라베이스> 등의 책은 최소 두 번씩은 읽었다. 기억나는 문장은? 아무것도 없다. 주인공의 이름은? 전혀 모른다. 다시 책을 펼쳐 보아도,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생소한 문장들이다.


“비할 데 없이 뛰어난 글의 내용과 누구인지 모르는 앞서 책을 읽은 사람과의 정신적인 연대감에 의해 나는 이중으로 고무되어 계속 책을 읽어 나간다. / 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들이대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내 자신의 필체였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p.88)/30년 동안 읽은 것이 다 헛일이라니! (...) 망각 이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니. (p.91)”


그렇다. 나는 지금 쥐스킨트의 단편 ‘문학적 건망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작가는 “어떤 책이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냐”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자신이 그간 읽었던 책들을 하나 둘씩 떠올려본다. 그 중에는 멋진 시도 한 편 있었다. 하지만 제목도, 시인도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건 그 시의 마지막 행 한 줄이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삶을 변화시킨 책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하지만 그 과정은 작가에게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과 함께 자신의 고질병, ‘문학적 건망증’에 대한 깨달음만 줄 뿐이다. 이런 순간엔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혹시 -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본다 ―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p.92)


그같이 훌륭한 작가도, 나와 같이 읽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니! 내 마음에도 한 줄기 위로가 찾아드는 듯하다.


스스로의 위안 끝에 작가는 다시 앞에 언급했던 시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너는 네... 인생을... 네 인생을”. 


하, 역시 천재는 천재다. 평범한 나와 비범한 그의 문학적 건망증이 어찌 같을쏘냐. 잠시 찾아든 위로는 날아가 버리고 만다. 그에겐 ‘문학적 건망증’ 마저 이렇게 훌륭한 글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문학적 건망증을 이겨내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봤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노트에 적는다든지, 독후감을 써본다든지 하는 것들. 하지만 늘 노트는 처음 몇 장에 끄적댄 게 전부. 독후감은 초등학교 시절 밀린 숙제처럼 느껴져 미루고만 싶어졌다.


아, 다행히 나에겐 좋은 습관이 하나 있다. 책을 모두 사서 읽는 것이다. 밑줄을 긋고 테이프를 붙이며 책을 읽는 습관 때문인데, 이건 아마도 ‘문학적 건망증’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내용이 기억나지 않으면? 다시 꺼내 읽으면 된다. 내가 적은 메모마저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지며 재미를 더한다는 장점도 있다. 아니다 좀 솔직해지자. 그래봤자 딱히 소용은 없다. 어차피 나는 곧 까먹고 말 것이다.


이제 와서 케케묵은 쥐스킨트의 <문학적 건망증>을 책장에서 끄집어 낸 것은, 그간 수도 없이 실패한 이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고질적 ‘문학적 건망증’을 좀 낫게 해보는 것. 물론 수일 내에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말이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문학적 건망증은 <깊이에의 강요>에 마지막 단편으로 실려있다


덧. 습관 하나도 바꾸기가 힘든데, 삶을 바꾼다니.

먹다 남은 술 싸오는 습관은 여전하다. 문학적 건망증을 고치다가, 음주 치매 얻는 건 아닌지.

로버트바인 리슬링. 리슬링이니까 용서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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