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는 달이 두 번 뜨는 밤이길,
나는 서울 근교라고 하기에는 무리한 거리인 경기 남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그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부모님 소유의 집에 살아가는 입장이니 자꾸만 집이 멀다고 불평하기에는 내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져 간다. 서울 땅 한 켠에 도시의 빛과 함께 달과 별이 뜨는 집을 마련하는 일, 내 집 마련의 꿈은 대체 가능하기나 한 걸까. 내 집 마련이라는 게 남 얘기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내 얘기더라. 공중에 둥둥 떠다니던 어른들의 고민은 어느새 내게 모두 몰려와 한껏 안고 있는 나의 고민이 되어버렸다.
강남에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탔다. 한 시간 남짓 기나긴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집에 제대로 도착해야 한다는 불안 때문인지 나는 좀처럼 대중교통에서는 잠을 청하지 못한다. 습관처럼 이어폰을 귀에 꼽고 뮤직 플레이어 재생 버튼을 누른 다음, 조용히 흘러가는 노래를 듣는 둥 마는 둥 등받이를 뒤로 젖힌다.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역시나 핸드폰을 뒤적거리는 수밖에.
(밀린 메신저 메시지를 확인한다.) 동생으로부터 오늘 야구경기 중 이용규 선수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이 와있었다. 짧게 기른 수염부터 왠지 느낌 있는 이용규 선수, 열정적일뿐더러 실력 있는 선수인데 중요한 시즌에 부상을 당했다니 속상하다. 큰 부상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기사를 검색해 본다. 부상의 정도는 내일이나 되어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실시간 검색어에 '블루문'이라는 단어를 마주치게 되면서 나의 관심은 나도 모르는 새 달에게로 향하였다.
달과 별이라면 언제든 그리도 내게 흥미롭다. 미지의 신비로운 우주, 밤을 밝히는 빛. 나도 블루문이 파란 달이라고 생각했건만 양력 날짜로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뜨는 현상 중, 두 번째로 뜬 달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한 연예인이 소원을 빌기 위해서 블루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SNS에 띄웠던 거 같다. '소원이라...' 내 소원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있다가 버스에서 내리면 하늘을 한 번 봐야겠다고 무심하게 생각했던 거 같다.
(다시 10년 지기 친구 4명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 입장.) 친구니까 답답한 마음에 집이 멀다고 투정을 부렸다. 사실은 집이 멀어서 힘든 건지 집이 없어서 힘든 건지 모르겠다만, 진로도 막막하고 집도 먼 나는 오늘따라 희망이 유난히 아스라이 멀게 느껴졌고 미래도 깜깜한 거 같았다. 모두 청춘의 때가 힘들다고 말하지만 오늘은 내 이야기가 가장 가련한 거 같았다. 사실 인생에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다만 행복하고 싶었는데 얼마 전 성공하고 싶어졌다는 친구의 말이 묘하게 공감되었다. 성공이 행복을 보장해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도 그 친구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찾아서 하고 있는 터라 몸이 고생해도 그냥저냥 잘 버티더라. 진로를 고민하는 내게 그녀가 조언한다. 좋아하는 일은 잘 하게 되더라면서, 하다가 그 길이 아닌 거 같으면 그때 안 해도 되는 거라고. 시작도 하기 전에 과도한 부담과 책임을 느낄 필요는 없단다. 꿈 찾아서 일하는 어른이 얼마나 있겠냐고, 다들 본인이 하기 싫은 일이라도 참아내며 하는 거라서 나에게도 강요하듯 말하는 거라고. 그저 공감이 되었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면 분명 포기하게 되는 것도 그만큼 많지만 단지 선택의 문제이고 묵묵히 내 삶에 책임을 지면 그게 어른이지 않겠냐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 쯔음에 얼마 전에 결혼한 새댁 친구가 나타나 메시지를 보내왔다. 건강 문제 때문에 아기를 일찍 갖기를 고민하고 있단다. 하늘에 흐릿한 저 먼 별 둘처럼 우리 고민의 흔적 또한 멀다. 점과 점 사이를 잇듯이 우리의 고민도 손가락으로 따라 이어 본다. 우리가 이러쿵 저러쿵 세상 살기 어려운 거 같다며 언제 이렇게 나이가 먹은 거냐고 얘기를 나누고 있을 쯔음, 지방에 주말 출장 갔다가 응급실 다녀온 후 집에 실려오고 있는 친구가 말한다. 근육이 긴장해서 통증이 있었단다. 허리가 버텨주기 싫었다보다. 지독한 주말 출장을.
언제쯤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세상에 많고 많은 청춘 얘기에 내 고민은 공기 중으로 흩어질 거 같았다. 보편적인 말로 원래 그렇게 힘든 거야라고 말하면 내가 지금 힘들다고 느끼는 감정은 흔한 위로 속에 묻힐 거 같았다. 나는 청춘이 이렇게 고민스럽고 막막한 거라면 얼른 삼십 대 중반쯤 되고 싶어졌다. 하루라도 고민을 안 할 수는 없는 걸까. 흔들리는 버스처럼 내 마음도 뒤숭숭하게 흔들렸고 길 밖은 어두웠다. 그리고 좀처럼 달리지 못하고 정류장마다 쉬어가며, 방향도 좌회전, 우회전 뒤죽박죽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또 다른 단체 채팅방.) 한 언니가 아픔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문자로 이루어진 메시지로부터 바닥으로 짙게 내리 깔리는 한숨이 묻어난다. 오래동안 만나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단다. 나는 더 이상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위로랍시고 몇 마디 했는데 그런 말이 위로가 될 리 만무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냥 만나서 아무 말없이 함께 있고 싶었지만, 이미 내 몸은 버스 안에 실려가는 터. 아무리 통신이 발달했다고 할지라도 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는 모양이지. 그저 내 마음이 메시지 속에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녹아있길 바라며 문자 한 획 한 획에 마음을 실어 머나먼 곳에 있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Zion.T 그의 노래 가사처럼 힘들 때 꺼내먹을 수 있는 초콜릿 한쪽, 사과 한쪽과 같은 위로가 유난히 필요한 날인 거 같았다.
삶에는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아픔이 있고, 짙어진 고민과 함께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이 있나 보다. 나는 정말 고민스러울 때 잠을 청하여 고민으로부터 도망가는 편이거늘 눈을 뜨면 여전한 현실이 있다. 아까 전까지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고민스럽다고 느껴졌는데 우리 내의 인생은 다 이모양 이꼴인가 보다. 한 사람의 부재가 주는 그리움은 어찌할 것이며 알 수 없는 내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사회가 주는 부당한 대우와 어느새 주어진 자격이란 자리에서 저지르는 서툰 실수를 어떻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꿈, 희망이라는 것이 있는 게 꿈이고 희망이 되어버린 역설적인 어두움이 고작 20대 후반에 내가 만난 청춘인가. 하지만 억지스럽게 긍정을 짜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있는 현실을 멀뚱하니 바라보니 내가 중얼거린 말이 마음에 둥실 떠올랐다. 아까 이별을 맞이한 언니에게 전한 말이다. 그대가 살아있음에 기뻐하고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그래서 사람은 그런 작은 사랑의 빛을 나도 모르게 머금고 모아가며 살아가는 거 같다고. 나를 살게 하는 힘은 지금의 내가 있게 도와준 주변 사람들의 수 없는 사랑이 아니었겠냐고.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고 기억조차 모두 할 수 없는 뿌옇게 흐린 사랑이 밤 하늘 공기 같아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렸고 집으로 흘러들어갔다. 집에 와서 기억난 건데 아까 블루문을 보려던 것을 잊어버렸구나 싶었다.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베란다로 나가 보았더니 불 꺼진 아파트들 사이로 달은 보이지 않는다. 삶의 고민들이 희망을 소원하는 것을 잠시 잊게 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희망이라는 달이 두 번 뜨는 날이면 좋겠다고, 블루문이 뜨는 날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