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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람 Sep 03. 2016

그들이 사는 세상, 그곳은 과연 유토피아일까

J. G. 발라드 - 하이라이즈

로버트는 한 손을 들어 앤서니에게 알은 척을 했다.

그러나 앤서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미리 전화를 걸어 스쿼시 게임을 취소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걸까?

옥상에서 파티가 진행 중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이리로 올라오게 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파티에 온 손님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말이다.


디스토피아나 아포칼립스 같은 것을 좋아한다. 딱히 암울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다른 장르보다 선호하는 것도 아니지만…… 왠지 끌린다고 할까. 한없이 높이 솟아있던 무언가가 점점, 혹은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에 경이감을 느끼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당히 악취미다.


내가 하이라이즈를 읽으면서 주목한 것은,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의 전환.

한정된 장소에서의 명확한 상하관계.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과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 단지 지켜보는 사람.

여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사실은, 이 아파트에 사는 누구도, 어딘가 잘못 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자각하지 못한다는 거다.


밖에서 보자면 하나하나 잘 나가는데다가 전부 다 중상위 권 이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부러워할 만하다.

한 건축가가 하이라이즈라는 아파트를 짓고 그 안에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건축가가 살고 있는 가장 위층은 권력의 끝을 상징한다. 그로부터 아래층으로, 점점 멀어질 수록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히 권력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고 먹이사슬로 보자면 자연에서 도태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무의식중에 그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에 가까워지기 위해 사람들은 위층의 삶을 소망하며 등반을 하듯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위에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자신들이 있는 층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아래층 사람들을 보는 그들의 심정은 두려움이다. 현재의 자신들과 아래층 찌꺼기들의 운명이 한 순간에 뒤집힐까 두려워 그들은 건축가 앤서니를 선두로 해 올라오는 사람들을 막는다.


맨 처음에는 분명 서두가 되는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야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겠지만.

어쩌면 그 많은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으로 이사 오는 것 자체가 이 끝없는 긴장감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이라이즈는 하나의 사회다.


그 안에는 굳이 아파트를 벗어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또 하나의 세계가 구축되어 있다. 근데 기묘한 점은, 위층과 중간층, 아래층을 아우르는 권력의 중심이 그 세계에서 나온다는 거다. 층을 구분하는 중간 지점에는 놀이터와 상점, 학교, 수영장 등이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필요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밖에서는 상당히 잘 나가던 사람들이 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스스로의 파멸을 촉구하며 권력이라는 것에 집착을 한다. 어딘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들은(권력에서 도태된 사람들은) 다행히 하루 빨리 벗어날 수가 있었지만 그 외에 나머지 사람들, 이 사회에서 적응을 해버렸거나 여기 아니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사람들, 용기가 없어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남아 하이라이즈는 끝내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낸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도대체 경찰을 무엇을 하느라 이 상황을 그저 방관만 하는가.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중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는가.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기 전에 경찰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야 하지 않았나.

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그들이, 누구도 아니라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들은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입을 다문다는 함묵적인 불문율을 가지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출근을 하고 돌아와서는 위로 올라가기 위한, 혹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밤이 되면 마치 "우리는 참 즐거운 인생을 보내고 있어요." 라고 광고라도 하듯 현란한 파티를 벌인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범접할 수 없는 자존심이고 추락하면서도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며 밖의 사람들은 저들은 참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가, 드디어 완성되는 거다.



고작 아파트일 뿐인데, 어떤 공간 하나를 두고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무색할 만큼 최고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 작가에게 그저 묵묵히 박수를 보낼 따름이다.

하나의 공간 안에서 이런 이야기가 벌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그들이 인간이라서가 아닐까. 다른 무엇도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권력으로부터의 욕망, 이대로 가다간 도태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것들이 모여 절망을 구축해간다.


소설은 마지막에서 시작해 마지막에서 끝이 난다.

내가 소설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로버트가, 어쩌면 이 하이라이즈에서 소름끼칠 정도로 적응을 잘한 인물이, 개고기를 뜯어 먹는 장면.


이 소설의 배경이 외국이고 외국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무너진 세계를 엿볼 수가 있었다. 단지 절망만 남아있을 때,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관념을 포기하기 마련이니까.

앤서니는 이 건물이 이웃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갔다.
특히 에베레스트 산이 자기보다 높다는 이유 만으로 무작정 등반하고 보는 리처드 와일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심한 척 종일 발코니에서 바깥만 내다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건물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로버트 랭 같은 개성 강한 인물들이 그의 흥미를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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