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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람 Sep 03. 2016

나를 집어삼키는 망령의 그림자

대프니 듀 모리에 - 레베카

"전에도 가보신 곳인가요?"

어느새 기분이 나아진 내가 물었다.

"그래요."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러 해 전이지요. 변한 게 있나 보고 싶었어요."

"변한 게 있었나요?"

내가 물었다.

"아니, 전혀 변하지 않았더군요."

무엇 때문에 그가 나라는 목격자까지 데리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는지 의아해졌다.

그와 또 다른 시간 사이에는 얼마나 긴 세월이, 얼마나 다른 행동과 생각이, 얼마나 다른 상황이 놓여 있을까.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괜히 온 것 같았다.


이 책은 뮤지컬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영화나 책과 마찬가지로 뮤지컬도 무척 좋아하고 즐겨 보는 나로서, 뮤지컬 레베카의 어느 한 넘버링에 마음을 빼앗겼고 온 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거대한 무언가가 머리를 내려치는 육중한 충격.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이 소설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없는 돈을 긁어 모아 책을 사기 위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을 때 느낀 것은 지독한 실망감이었다. 사람들이 책 레베카에 단 리뷰 중 대부분이 번역이 엉망이라는 말이었고 책이 읽고는 싶은데 엉망인 번역판은 구입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많이 망설였다. 결국에는 일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엉망은 아니었다. 단지 다른 책들에 비해 오타와 틀린 맞춤법이 유독 많았던 것만 빼면.

문장 자체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주지 않는 한 충분히 읽을 만하다고 판단, 책을 반납하고 나서도 잊히지가 않아 구매를 하고 말았다.


레베카는 소설 제목임과 동시에 소설 속 배경인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 안주인으로 이미 죽은 지 수개월은 된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점은, 이 레베카가, 이미 망령이 된 그녀가, 맨덜리 저택을, 남녀 주인공을,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집어삼켜버렸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나'는 무려 20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맥심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져 맨덜리로 오게 된다. 새로운 드 윈터 부인으로서. 그녀는 처음엔 부푼 가슴을 안고 아름답고 유명한 매덜리로 오게 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것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들 뿐이었다.


레베카를 숭배하는 댄버스 부인, 여전히 레베카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맥심, 레베카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또한 매력적이었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 레베카와 '나'를 비교하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들.

나는 레베카는 이미 죽었다고 애써 되뇌며 맨덜리에, 맥심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을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던 배 한 척이 떠오르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결말로 치달아간다.


이 소설은 독자가 어쩔 수 없이 레베카에게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런 식으로 정교하게 자여져 있는 소설이다.

애초에 레베카는 무척 매력적으로, 아주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드러나는 반면 '나'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조용하며 쑥스러움을 많이 탈 뿐만 아니라 레베카에 대한 자격지심까지 가지고 있다. 또한 그녀의 지나치리만큼 풍부한 상상력은 레베카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도록 만드는 또 하나의 장치다.


게다가 레베카에 대한 정보는 여러 사람들에게서 셀 수 없이 흘러나오는데 반해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심지어는 이름조차 말이다.


당신 이름은 아주 독특하고 사랑스러워요.


'나'의 이름은 끝끝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레베카보다는 오히려 주인공인 '나'에게 더 호기심을 느꼈다. 그녀가 얼마나 매력 있느냐는 둘째 치고.

나는 어리고 사랑스럽고 순진하며 학생에서 갓 벗어난 20대 초반의 여자이다. 혹은 10대 후반일 수도 있고.

이처럼 다분히 의도된, 어딘가 절제되어 보이는 정보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그것 빼고는, 레베카가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책 속 등장인물들은 물론이거니와 책을 읽는 독자들까지 레베카의 매력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한다. 나중에 가서는 주인공 따위는 안중에도 없게 되는 것이다. 단지 레베카만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이 끝을 맺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레베카만.


처음에 내가 레베카에게 느낀 감정은 호감이었다. 사람들의 설명만 보자면 친절하고 당당하고 누구보다 눈부시게 빛나며 화려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자. 한 번 보면 정신을 빼앗기고 마음까지 저당 잡혀 순식간에 발밑에 엎드리도록 만드는 그런 여자.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인 '나'가 느꼈을 지독한 패배감을 나 또한 똑같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맥심이 이 여자를 사랑했고 잊지 못하는 이유가 납득이 될 정도로.


그 다음에는 질투심. 이것 또한 이해가 된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라에게,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그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 아닌가.

그리고 잇따른 절망감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가로막던 장벽이 걷히고 진실이 표면에 드러나는 순간에 느껴지는 것은-

경멸과 환멸, 증오. 그것을 억누를 정도로 가슴 깊이 느껴지는 어떤 두려움과 긴장감.


뮤지컬은 조금 더 행복한 결말에 중점을 맞춰 맥심과 나의 로맨스를 부각시킨다. 소설과는 다르게.

뮤지컬도 뮤지컬 나름대로 재미가 있지만 나는 소설의 엔딩도 나쁘지 않았다.


주인공인 '나'가 우리는 결국 레베카에게 이겼다, 라고 말을 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글쎄? 라고 반문하는 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레베카의 미소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한 순간도 멈출 수가 없었고 레베카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삐걱거리는 고딕 소설 특유의 분위기와 스산하게 울리는, 망령 레베카의 발자국 소리, 내면을 파고드는 심리 묘사와 더불어 충격적인 결말까지. 어쩌면 평생 동안 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그를 맥심이라고 불렀다.
나를 포함해 그보다 어리거나 별 생각 없는 이들도 그랬다.
맥스라는 호칭은 그 부인의 선택, 그 부인만의 권한이었다.
부인은 그 이름을 시집 속표지에 자랑스럽게 써 넣었으리라.
흰 종이 위에 그 힘차고 부드러운 필체를 거침없이 남기며.
얼마나 여러 번, 얼마나 다양한 상황에서 그 부인은 남편에게 그런 메모를 썼을까…….
작은 쪽지도 있었을 테고 그가 멀리 떠나 있을 때에는 몇 장에 걸쳐 그 둘만의 이야기를 담은 편지도 보냈겠지.
그 부인의 목소리는 집 안 곳곳에서, 그리고 정원에서 울렸으리라.
시집에 남은 필체처럼 거침없고 익숙하게.
그리고 나는 그를 맥심이라고 불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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