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 - 설득
그들이 해변에서 위쪽으로 연결된 계단에 이르렀을 때 동시에 내려올 준비를 하던 신사 하나가 뒤로 물러서며 그들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들은 올라갔고 그를 지나쳤다. 그들이 지나갈 때 앤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던 그가 진지하다 할 정도로 감탄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을 그녀가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자태는 매우 아름다웠다. 균형 잡힌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얼굴에 불어오던 상쾌한 바람과 그 바람이 불어넣어준 생기 띤 눈빛으로 되찾게 된 젊음과 생생함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신사가 그녀에게 몹시 탄복한 것은 분명했다. 웬트워스 대령은 즉각 신사가 그녀를 바라보던 식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는 그녀를 잠시 일별했다. 밝은 눈길이었으며 그 눈길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 신사가 당신에게 반했어요. 지금 내 눈에도 앤 엘리엇다운 무언가가 다시 보이는군요.'
시공사 판 제인 오스틴 전집을 구매하게 되면서 옛 기억도 떠올릴 겸 다시 읽게 된 책이다.
여성 작가들 중 제인 오스틴을 열렬히 좋아하게 된 계기가, 설득이라는 소설 때문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이 책은 나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랑에 빠지던 그 순간을 되새기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게 되는 즐거움을 깨친다고나 할까.
하나의 책을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의 상태로 맞닥뜨리는 것과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미 읽었던 내용이라서 다음 순간을 상상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다음 순간에 이어질 장면을 떠올리면서, 문득 묘한 기대감이 마음속에 자리하는 것이다.
마치, 난 어떤 장면이 나올지 알고 있다, 와 같은 순수하면서 비밀스러움을 공유하는 기쁨.
그래서 그런지 두 번째 읽는 설득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를 대하듯 읽는 내내 설렘이 가득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주인공 중 「오만과 편견」의 앨리자베스 다음으로 좋아하는 앤 엘리엇.
소설은 그녀가 주변의 설득과 자신의 성급한 판단으로 인해 이별을 맞이했던 연인이 8년 뒤에 해군 대령이 되어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그와 헤어진 뒤 서서히 그에 대한 마음을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자신의 동요와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통해 그를 결코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그녀의 마음과 달리 그녀를 마주한 웬트워스 대령은 그녀에 대해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볼 뻔했다."라는 평가와 함께 앤 엘리엇만 아니라면 누구와도 결혼할 의사가 있다는 생각을 굳건히 한다.
머스그로브 씨의 딸들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만 한다면 어느 쪽이든 마음이 있었다. 요컨대 자기 앞에 나타나는 유쾌한 여성이라면 다 좋았다. 앤 엘리엇만 아니면 된다.
p. 86
내게는 저 말이, 주변의 설득에 넘어가서 자신을 저버린 앤 엘리엇에게 부리는 투정 정도로 여겨져서 실풋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렇게 단호하게 저 여자만 아니면 된다고 말을 하다니. 그야말로 여전히 나는 당신을 신경 쓰고 있답니다. 라고 말하는 꼴이 아니고 뭔가.
두 사람은 가능한 한 서로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과 상황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의식하게 된다.
대화중에 그는 자신이 바라는 여성상을 은연 중 내비치게 되는데 그 대사에서 그가 과거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제가 관심 있는 사람에 대해 가장 바라는 것은
그들이 단단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앤은 굳건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했던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설득과 압력에 넘어가 그와의 약혼을 파기한 적이 있고 8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처받은 자존심은 그 트라우마를 잊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다음 순간, 그는 앤이 청혼을 거절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는데 그 말을 듣고 난 뒤의 그의 반응이 흥미로웠으나 그것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그가 속마음을 속절없이 표현할 때에야 누리게 될 즐거움이었다.
내내 침착하고 다정하고 사려 깊은 앤의 성격 때문에 오만과 편견에서처럼 밀당의 스릴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오래 전에 어긋나버린 두 연인의 재회와 그것을 다시 맞춰 가는 과정은 편안한 두근거림을 안겨주었다.
여름날의 뜨거움도 겨울날의 차가움도 아닌 봄날의 따사로움 같은.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 내내 어긋나있던 두 사람이 완벽하게 맞물리는 것을 보면서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마주한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물을 펑펑 쏟을 만큼 애타지도 감격스럽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가슴 한 편이 뻐근해지는 아련함이 찾아들었다.
8년 전의 아픔을 딛고 비로소 단단해진 앤 엘리엇과 그녀에게 받은 상처에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차마 접을 수 없었던 프레더릭 웬트워스의 사랑이 과연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변치 않았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그걸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 아닐 것이다.
독자들이야 그들이 행복했을 거라고 믿고 그들이 분명히 이루어나갔을 가정의 평안을 상상하며 조용히 미소 짓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그 소식을 들은지 5분도 안 되어 난 ‘수요일에 바스에 있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바스에 있었지요.
여기 올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 게, 어느 정도 희망을 안고 온 게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나요?
당신은 미혼이었습니다.
당신도 나처럼 과거의 감정을 갖고 있을지도모르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이 내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다른 남자들이 당신을 따라다니고 청혼도 할 거라는 점에 의문이 있었겠습니까만,
나보다 더 그럴 듯한 남자 중에 적어도 한 사람을 거절했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나 때문인가'하는 혼잣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