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대학 새내기 때이다. 1학년 필수 교양과목으로 '사고와 표현'이라는 수업을 들어야 했다. 논리 논술 함양을 위한 글쓰기 교양이었다. 당시에는 채 몰랐던 것이 있는데 내 논술 실력은 형편없었고 그 수업을 필두로 당해 학점은 C-를 받게 된다. 대학을 올라오고 나서 내 학점은 한동안 그랬다. 자신감과는 결단코 무관하게도 내 논리력이란 아주 비참하였으며, 국문과 특성상 후에 치르게 될 모든 시험이란 주제를 달리할 뿐 논술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돌아간다면, 공부를 적게 하고도 시험에 잘 맞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아, 아닌가. 겨우 읽어볼 만한 글이 되었을 뿐, 여전히 내 글이 논리적이지는 않더라는데. 근래 피드백 받은 것들을 얼른 떠올린다.
이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해당 수업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다. 중간고사 과제 대상이었다. 애석하게도 교수님은 대학 1학년 평균의 지적 수준을 너무 과대평가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이 책을 읽은 동기들 대부분의 반응은 '기묘한 통속소설' 그 언저리에 걸쳐 있는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아직 감상과 해석을 분리하여 바라보기 어려웠기에, 또한 성 관념에 있어 닫혀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마, 책 내내 반복하여 등장하는 문란한(?) 성관계의 단상은 참아내기 어려웠다.
결국 우리가 책에서 도출할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이 참아내기 어려운 문란한 성관계와 그 인간적 욕구에 국한하여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차마 바라보기도 어려운 이 성적 욕망의 난립과 그로 인한 관계의 불온한 갈등이 바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쯤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10년 만에 다시 그 책을 펼친다. 당연히 감상은 달라져 있었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오묘한 기분에 젖어든다. 아예 잊고 있던 과거의 이야기들이 다시 떠오르누나. 그것으로 이 기나긴 글의 서문은 열린다.
일찍이 우리가 도출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의미, 그 한계와 내 학점은 무관했다. 개중에도 누군가는 A+를 받고 누군가는 C-를 받는다는 것, 학점은 그 안에서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내 논리력은 특출나게 형편없었고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그것을 스스로 체득하기란 요원하다는 점에 있었다. (무시무시한 일이다, 참으로!) 논리력의 핵심은 자기자신에의 거리감에 있었노라 생각하기에, 논리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그 사실을 인지시키는 것은 요원한 일. 적어도 갈등과 저항 없이, 수월히 안착하기를 고대하기란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는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야 각자 만별할 테고.
논술 수업의 학점 C-는 그 자체로도 점수로서의 의미를 갖지만, 무엇보다 한 인간의 논리력을 가늠하는 척도로서 더욱 큰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당시에는 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내 논리력이 훌륭하다고 믿었고, 거기엔 근거 따위는 없었다. 오직 나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 그 강렬함만을 알았으며, 그러한 태도로 살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니 나는 당연히 그 점수를 부당하게, 혹은 '부조리하게' 생각했다. 노골적으로 말해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딱한 사람의 감상'이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격하한다. 자신의 주관과 세계의 의견이 대립할 때, 어느 한 가지 편에 지나치게 매몰된 사람은 그 반대편을 격하할 수밖에는 도리가 없는 것이다. 후에 말하겠지만 어찌 이러한 나의 주관, '끝없이 강렬한 속삭임으로서의 주관'과 내가 화해할 수 있었으랴.
참을 수 없는 느낌, 거기에 근거 따위는 없었다. 오직 느끼고 끊임없이 느껴지는 그것. 나 자신이 옳으며, 내 안에 남들과는 다른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잠들어 있고,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순차적으로 세상에 현현하리라는 강렬한 느낌, 나 자신을 부당점유하고 있는 이 '거부할 수 없이 강렬한 느낌'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감히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속절 없는 강렬함이 내포하는 진짜 맹점은, 바로 '근거 없는 부조리함'의 인상을 자꾸만 양산한다는 점에 있다. 세계로부터 무분별하게 부조리함을 느낌으로써, 그런 나 자신이 부조리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내가 비논리적 인간이라는 그 표면적 사실 자체보다도, 나를 비논리적 인간으로 만들게 했던 이 내적 동기, '강렬한 주관적 느낌' 바로 그것 때문에 내 논술 학점은 C-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대인관계와 희구하던 모든 목표까지도, 논리력 C- 의 그것으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미리 정해진바, 바로 그 빌어먹을 운명처럼.
여기까지, 이 정도의 분량만으로도 넌지시 알게 되다시피 나는 무거운 종류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운명적이다. 낭만적 운명론을 예찬하자는 것은 아니다. 아주 무겁고 무거운 것으로서, 그것의 선후 관계를 있는 힘껏 드러내고자 함이다. 차라리 보기에 버거운 것이 된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필연, 말하자면 그것을 있는 힘껏 드러내는 것이 차라리 보기에 버거운 것, 무거움이 된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에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나로서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선택, 즉 운명적이다. 즉 내 전적인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거움, 나는 아주 무거운 종류의 인간이다. 나의 실존이 낳는 질문과 대답, 어느 것도 무거움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주관적 느낌', 자신에의 무분별한 확신이 애초부터 질문을 낳는 무거움이었다. 곧이어 그에 대한 저항과 의심, 커다란 반발감과 그에 상응하는 의구심이 무거움이요, 그럼에도 나아갈 밖에 없었기에 다시금 쟁취하는 당위성과 확신이 바로 그 뒤를 따르는 무거움이었다. '강렬한 주관적 느낌'과 그에 대해 저항하는 삶, 한 가지 무거움으로부터 태어나 거듭 순환하는 무거움. 내 본디 주어진 것인 생명과 그로 인한 내 선택, 그리하여 생겨나는 확신하고 관철하는 삶의 태도, 그 무게감. 나는 이런 것을 운명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결단코 훌륭함,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받을 만한 그 무엇도 아니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은 하다못해 올바르다거나 의미로운 것인가. 그것은 아무런 후회와 실패도 낳지 않는, 타당키만 한 것이었으랴. 오, 천만에 그럴 리가.
나의 무거움은 일종의 'Es muss sein', 즉 '반드시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의 '거부할 수 없는 주관적 느낌'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더라면, 그럼에도 내가 겪은 고뇌가 필히 겪게 될 것으로서 정해진바, 전적으로 나의 것이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나아가 내가 그 주관과 화해하거나,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하거나, 불필요하고 귀치 않은 것이라고 격하하여 살 수 없는 것이었다면, 즉 적당함, 즉 가벼움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어찌 내가 그 '부조리한 주관'과 화해하거나, 동침할 수 있었을까!? 하여 내가 나의 이 느낌을 버릴 수 없으면서도 그 느낌과 살아야 하며, 또 그것에 저항해야만 했다면 내 무거움은 필연인 것이다. 내게 무작위로 주어진 한 번뿐인 이 삶은 무거움이 되어지는 것이고, 무거움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책에서는 '토마시'를 움직이게 만든 힘, 그리고 회한과 허무를 남긴 바로 그 강렬함,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의지와 확신, 무거움의 문장이다. 테레자는 가볍기만 했던 토마시의 삶으로 들어온 유일한 무거움이었고 그녀는 토마시의 가벼움, 여성편력과 타지 생활의 힘겨움으로 인해 결국 떠나간 상황. 서로를 충분히 인내한 두 사람에게 이별이란 어쩜 유일한 자유, 서로가 각자 서로인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토마시는 테레자에게로, 스위스에서 체코로 돌아가기로 한다.
토마시는 근무하던 병원 측에 구구절절 변명하지 않았고, 그가 근무하던 취리히 병원의 원장은 무책임하게 돌아가려는 토마시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토마시는 말한다, "Es muss sein. Es muss sein", 그는 베토벤 현악 4중주 16번 4악장(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의 은유로 말하였고 음악 애호가인 원장은 이내 잔잔한 미소로 되묻는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이에 토마시는 다시금 말한다. 'Ja, es muss sein!' 그래, 그래야만 한다!
토마시에게 스위스란 일종의 가벼움이었다. 프라하 상공을 날아다니는 소련군 폭격기의 날카로운 소리와 도시를 점령한 보병들이 자아내는 으스스한 분위기, 전 체코를 감돌고 있는 무거움으로부터의 자유. 소련군 침공 하의 프라하에는 온갖 첩보공작 행위들이 난립했고 그보다도 무시무시한 것이 있었으니, 이 모든 것들이 사방에서 은밀히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토마시는 그런 프라하로부터 취리히로, 무거움으로부터 가벼움으로 떠나왔고, 테레자는 프라하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자유의 달콤함도 잠시, 그는 테레자에게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느낀다.
토마시는 테레자와의 짧은 이별 후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했다고 서술된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왜!?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나의 그것인 '거부할 수 없는 주관적 느낌'과 마찬가지로. 작중에서는 그 (표면적) 이유로 깊은 동정과 연민을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사람에게 있다. 그 동정이 깊고 무거웠다기엔, 그러니까 그것이 결정적이고 본질적이었다기엔 토마시는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절망감을 앓게 된다. 그러나 그 동정이 곧 사라질 착각의 환영이었다고 하기에도 모자람이 있다. 그의 동정이 가벼움이었더라면 이별과 만남의 패턴은 반복되었을 테지만, 토마시는 이후 영영 테레자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라질 가벼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 토마시는 그녀의 곁에서 후회한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그는 테레자에게 얽매여 칠 년을 살았고, 그녀는 그의 발길 하나하나를 감시했다. 마치 그의 발목에 방울을 채워 놓은 것 같았다. 이제 그의 발걸음은 갑자기 훨씬 가벼워졌다. 거의 날아갈 듯했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마술적 공간 속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부 가벼움과 무거움, 54p 中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 중략 … 그러나 잠시 후 체코 국경을 넘자 그는 소련 탱크 행렬과 마주쳤다. 검은 군복을 입은 흉측한 전차병이 사거리에 자리를 잡고 보헤미아의 모든 도로가 자기 것이라는 듯 교통을 정리했다. 토마시는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라고 되뇌었지만 금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그래야만 할까? 취리히에 남아 프라하에 혼자 있는 테레자를 상상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동정심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일생 동안? 한 달 동안? 딱 일주일만?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부 가벼움과 무거움, 60~61p 中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을 거야." 당시에도 그 말을 듣고 토마시는 야릇한 우울함에 빠졌더랬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 중략 …
토마시는 그의 친구 Z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보다는 'Es konnete auch anders sein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칠 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 신경통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시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호텔이 다섯 개 있었는데, 토마시는 '우연히' 테레자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자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시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시를 테레자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다.
… 중략 …
절대적 우연의 화신인 그 여자가 지금 그의 곁에 누워 깊은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절망의 순간에 항상 그랬듯 토마시는 위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테레자의 호흡이 한두 번인가 가벼운 코 고는 소리로 변했다. 토마시는 추호도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느낀 유일한 것은 위를 누르는 압박감, 귀향으로 인한 절망감뿐이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부 가벼움과 무거움, 63~65p, 完
책 중에서도 언급되었듯 우리는 우리 사랑을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 일종의 'Es muss sein'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의 왕국에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무언가이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놈이었을 테고,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또 다른 여인이었겠지.' 그럼에도 우리로 하여금 그 냉담을 가리고, 눈앞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확신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리고 그 확신은 무엇으로 보증되는 것이며,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이 모든 '사실'들과 무관하게 타오르는 것이자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인 '강렬한 확신'이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남을 수 있었을까.
우연으로부터 발생하는 필연, 미지로부터 태어나는 확신, 그러한 사실이 아닌 그러한 느낌, 그 강렬함이란 인간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테마일 것이다. 언제나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느낌, 사실 이전의 느낌, 곧 영감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대한 필연을 느끼었기에 그것은 필연이 되는가, 혹은 그것이 필연이었기에 느닷없이 그러한 느낌이 계시처럼 오는가.' 딱 잘라 말해볼 수 없는 것, 왜냐하면 우리에겐 우리도 다 알 수 없는 인과적 이해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실들의 파편들로부터도 한 가지 미래를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테레자의 사랑이 그러했듯이!
별 볼일 없는 시골의 술집, 추접스럽고 비릿한 눈빛을 흘리는 주정뱅이들과 음란한 말을 건네며 호시탐탐 여색의 기회를 엿보는 호색한들의 한가운데, 토마시의 테이블 위로는 한 권의 책이 올려져 있었고 이는 테레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이 시골 술집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해볼 수 없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고, 그건 베토벤 현악 4중주 16번이었다. 겨우 이 정도의 우연만으로도 테레자에게는 대담한 용기, 그 이전의 무언가가 태어난다. 그건 장차 두 사람을 평생토록 괴롭게 할, 필연적 사랑의 감각이다.
그녀가 토마시의 아파트로 오던 날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던 소설 첫머리에서 안나는 브론스키를 이상한 상황에서 만난다. (註. 안나 카레니나) 그들은 방금 누군가가 열차에 치여 죽었던 역의 플랫폼에 있었다. 소설 끝에서 열차 아래로 몸을 던지는 사람은 바로 안나다. 처음과 끝에 동일한 테마가 등장하는 이러한 대칭 구성은 대단히 '소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적이라는 말이 '꾸며 낸', '인공적인', '삶과는 유사성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란 이런 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부 영혼과 육체, 92p 中
우연으로부터 태어난 필연, 미지로부터 태어나는 확신, 모순 같기도 운명 같기도 한 것. 마치 시골 술집 테이블 위에 올려진 책과 베토벤의 음악, 그로부터 태어난 테레자의 이 사람에 대한 확신과 대담함의 사랑 같이. 그것은 무슨 상관이고 무엇을 나타내는가. 그건 무척이나 많아 채 이해할 수 없는 인과의 실타래일 수도 있고 실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은 중요한가? 이 맥락 하에서는 결단코 중요치 않다. 그 확신과 필연의 느낌이 바로 그녀에게 확신하던 그것을 주었고, 그것이 일어남으로써 그녀의 확신은 사실이 되었기에, 두 가지 사실(믿음과 실재)은 서로 순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후(2편)에 '영원회귀'라는 관점으로 톺아볼 주요한 주제이자 그 관점이다.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질문은 '확신'과 그 '근거'이나, 더 엄밀히 말해보자면 '이미 태어나버린 확신'과 그에 대한 '의심으로서의 근거 추구'라고 보아야겠지. 신에 대해 그렇고, 사랑에 대해 그랬으며, 미래에 대한 모든 것, 꿈과 희망과 낙관(엄밀히 말하자면 낙관은 제외)이 그러했을 테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어날 것에 대한 것, 그리고 일어난 것으로부터 재귀되는 확신. 나는 내게로부터 태어나는 무분별한 확신, '거부할 수 없는 주관적 느낌'을 말살하느라 상냥하고 온유한 것, 말하자면 사랑에 대한 그것도 마찬가지로 죽어버렸다.
내게 사랑이 필연이 아니이며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오래된 친구처럼, 아무런 반가움도 없이 그저 자연한 것이다. 허나 그로써 나는 염세적 인간이 되어 있다. 한 인간이 염세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그 자신이 그렇게 되고자 스스로 결정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막아주던 무언가가 걷힌 비로소 그렇게 되어버리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염세에 불시착하고 나서 그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땐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한 번 알아버린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영원회귀에 대해 언급해도 괜찮을 차례가 온 것 같은데, 아무래도 분량이 너무 많아졌다. 독자들의 피로감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한번 끊어가도록 하자.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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