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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금이 있던 자리 Jun 26. 202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2

영원회귀에 대해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질문은 '확신'과 그 '근거'이나, 더 엄밀히 말해보자면 '이미 태어나버린 확신'과 그에 대한 '의심으로서의 근거 추구'라고 보아야겠지. 신에 대해 그렇고, 사랑에 대해 그랬으며, 미래에 대한 모든 것, 꿈과 희망과 낙관(엄밀히 말하자면 낙관은 제외)이 그러했을 테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어날 것에 대한 것, 그리고 일어난 것으로부터 재귀되는 확신. 나는 내게로부터 태어나는 무분별한 확신, '거부할 수 없는 주관적 느낌'을 말살하느라 상냥하고 온유한 것, 말하자면 사랑에 대한 그것도 마찬가지로 죽어버렸다.

- 전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 中 



확신, Es muss sein, 아름답고도 무거운 것. 사람을 알 수 없는 운명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그 확신이다. 확신, 사람에게 주어진 놀라운 힘,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열망이자 이끌림. 사람을 불분명의 안개 너머로 그저 나아가게 하는 것은 바로 확신, 그 믿음의 강렬함이다. '믿기에 그것은 마침내 일어나는가, 아니면 그것이 이미 일어날 운명이었기에 믿음은 계시처럼 오는가!' 앞서 말했듯 이것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테마이고, 그러나 나의 확신은 죽어버렸으며, 그것은 내 두 손으로 죽인 것이다. 그저 내겐 무분별한 확신이, '거부할 수 없는 주관적 느낌'이 너무 많아 지나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관을 거절하고 부정하고 배신해왔다. 나 자신의 느낌과 환희, 그것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감미로운 도취감을. 마침내 내가 부정하고자 했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죽었고, 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확신도 따라 죽었다. 감정은 들끓고 뒤섞이고 웅성대는 빛 무리와 같아, 어느 한 가지만을 표적하여 없애버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나는 염세적인 사람이 되었고 꽤 오래도록 길을 잃었다. 잃어버린 사람만이 무언가를 찾는 것이라면, 나는 꽤 오래도록 잃어버린 셈이다. 


이제 내 염세는 되묻는다. '이것이 네가 바라던 그 미래가 아니인가?' 그래, 동시에 아니. '허나 이것이 네 선택의 결과가 아니인가? 바로 네 두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인가?' 그래, 하지만 미리 다 알지는 못했던 것, 돌아볼 때에만이 모든 것은 선명해지기에. '후회하나?' 그래, 후회한다. 벌써 서른 두 번째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내게는 이제 한때 버리고자 했던 바로 그것, 내가 잃어버린 그 확신이 필요하다. '정말 후회하나?' 그래, 후회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을까? 정말로 내가 해왔던 그 잔인한 방식, 자신에 대한 막심한 부정과 경멸로만이 부조리한 자기 확신으로부터 이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어쩜 덜 잃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1. 가벼움과 무거움


그러나 다시 한번 그때 그 상태로 돌아가 똑같은 선택지 앞에 놓인다고 할 때, 나는 무엇을 택하겠느냐 물어보아도 나는 그것, 내가 택한 것들을 다시금 택하리라 답할 것이다. 이것은 회귀하는 삶의 질문. 나는 내게 주어진 것과 그에 대한 저항을 택해야만 한다 생각하고 있고, 여기까지가 내 무거움의 총체이다. '다시 살아도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면, 그 삶을 긍정하는가?' Ja! Es muss sein. '거듭 살아도 그래야만 하는가?' Ja! Ja! Es muss sein! 하지만 그것이 기쁨으로, 행복으로, 즐거움으로 거듭될 것인가. '그것이 그대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여, 기쁨이요 보람인가?' 오, 천만에 그럴 리가. "Nein!" 그것이 기쁨일 리야.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려는가? 그래야만 한다고?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했을까?' 후회, 그리고 회의란 그때 모르던 것을 지금 알게 되는 순간, 즉 사소한 깨달음의 순간이요 뒤돌아 보는 순간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하는 존재이자 상상하는 존재로서, 시간의 뒤편을 뒤돌아보는 존재이자 시간 너머를 내다보는 아마 유일한 존재이다. 뒤돌아보는 존재에게 후회란 삶의 필연적인 부분들이며, 삶은 존재의 모든 순간들의 집합이다. 그렇다면 뒤돌아보는 존재에 있어 삶이란 후회의 집합이라고도 비약하여 논할 수 있다. 하여 뒤돌아보는 존재에게 후회란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며 그러므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고, 동시에 내다보는 존재인 우리에게 삶의 총체란 루프 형태의 무언가가 된다. 뒤돌아보며 깨닫기를 반복하다가는, 미리 후회를 깨달아버리는 것. 미리, 어쩌면 영영 일찍인. 이것, 반복되는 삶의 총체적 패턴에 대한 인식은 나타나는 형태가 다를 뿐 '가벼움과 무거움'에 있어 동일하게 일어난다. 



본 책에 등장하는 존재의 무게,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은유는 자기 운명에 대한 각자의 태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적으로 반갑고 기꺼운 까닭은, 양비론적 태도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 있다. 어느 한 가지를 정답으로 상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면서도 미리 헤아리는 우리 존재에 있어 후회란 필연이겠으나, 그 후회를 대하는 태도는 각자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종속되어 있는 듯하다. 가벼운 자, 자신의 삶에 아무런 정답을 드밀지 않는, 그러므로 규율과 속박이 없어 자유로운 그 사람에게 있어 후회란 그저 일어날 무언가였으며, 다른 모든 삶의 순간이 그러하듯이 지나갈 무언가이다. 반면 무거운 자, 자신의 삶을 '필연적 감각'에 따라 판단하고 그러한 확신 속에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 있어 후회란 자기 실패이며 앞선 모든 순간의 좌절이자, 누려온 감미로운 확신만큼의 질량으로 반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욱 옳은가, 후회라는 테마를 놓고 보자면 가벼움이야말로 사람에게 권면할 만한 것인가? 책도 필자도 그렇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가벼움이 치를 대가는 권태이고, 무거움이 치를 대가는 염세 혹은 허무, 어느 것도 쉽게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가벼움이 치를 대가에 대해서는 다음 화(3편)에서 다뤄보도록 하자. 



2. 무거움의 대가


무거움, 자기 삶을 필연성에 의거해 바라보고 설계하려는 태도. 확신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 있어 후회의 무게란 그 자신의 태도가 표상한 대가이다. 후회란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대가에의 정산이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삶의 순간에 있어 완벽한 정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래야만 했을까?' 다만 미리 알 수는 없는 것. 우리 저마다 삶과 운명을 바라보는 태도란 자기자신이 조금도 결정하지 않았거나 자신조차 모른 채로도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치를 대가는 정산 시점에 봉착해서야 알 수 있었음이니. 그마저도 우리는 지불을 유예하려 한다. 허나 후회, 그것이 이미 대가이자 지불이었다는 것이란… 


'정말로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했을까? 그 방법뿐이었는가, 그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던가!' 무거운 자에게 있어, 후회가 삶을 교착상태로 만드는 것을 자주 보아왔다. 멈추어 버리는 것, 염세 혹은 허무, 그것이 무거운 사람이 운명에 있어 치를 대가이다. 'Es muss sein', 필연적 감각에 기인하여 자신의 인생과 운명을 대하는 사람은, 그것의 실패가 주는 커다란 고통, 확신의 무게만큼의 고통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확신이 강했던 만큼 좌절이 커다랬고 그리하여 아예 멈추어버린, 염세와 허무의 늪에 빠진 삶을 여럿 보았다. 존재의 순간을 끝없이 되돌아보다가는 이윽고 나아가기를 멈춰버리는 것. 너무 많이 깨달아버린 사람이 점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연히 커다란 실패와 후회로 나아가는 걸음이라는 것을, 그 사람은 학습해버렸기 때문이다. 과거가 미래를 결정해버리는, 이 기막히고도 사소한 일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거로 인해 미래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 일어나버린 것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은 모든 것들, 즉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란 얼마나 지독한 모순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제 와 그 사람에게 가벼움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이봐, 힘을 아껴봐." 그럴 수는 없는 법. 그는 무거운 존재로서 살아왔고, 그러한 존재로서 실패했으며, 그 대가를 겪는 중이기에. 무거운 존재에게 그 대가까지가 바로 자기자신의 무거움이기 때문이다. 겪은바 믿음의 실패란 이미 일어난 것이고 너무나 차갑고도 단단한 사실이라 불신자는 말한다, '이것은 드러난 진실이고 그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하여 여기까지 논지를 전개한 뒤 나는 다시금 묻는다. '믿기에 그것은 마침내 일어나는가, 아니면 그것이 이미 일어날 운명이었기에 믿음은 계시처럼 오는가!' 항상 이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해왔다. 계시처럼 와서 운명처럼 현현하는 것이요, 그것은 믿음에 상관없이 여기 충직한 두 발에 달려 있었노라고. 확신의 달콤함과 좌절의 쓰라림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믿음과 실재에조차 상관 없이, 그게 무엇이었든 내딛어야만 한다고. 우리는 실패를 향해 거꾸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 '다시 살아도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면, 거듭 살아도 그래야만 한다면 그 삶을 긍정하는가?' Ja, Es muss sein. 나아가기 위해서. '그것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었으며, 네가 지금껏 살아오고 느껴온 모든 것들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반복하게 되더라도, 그러므로 어느 세계선에서는 지금껏 느껴온 것과 똑같은 순간을 다시 마주하게 되더라도?!' Ja, Es muss sein. 오직 나아가기 위해서. '그렇다면 나아감, 그것을 확신하는가!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가?' Nein. '그렇다면 그것의 소기 가치와 의미를 믿는가!?' Nein. 이것은 보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믿음이고, 느끼는 것으로서가 아닌 결정한 것으로서의 믿음이며, 과거와의 결착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태도이다. '그럼에도 그래야만 하는가?' 그러하다. 여기까지가 내 무거움의 대가이고, 나는 대가를 지불하고서 삶을 건너가야 한다. 원인과 결과, 믿음과 실재, 그 인과의 역전. '믿기에 일어나는가?' 나는 그렇지 않았노라고 무겁게 조아린다. 이는 과거에 대한 조의. '일어나기에 믿을 수 있었던가?' 나는 그렇지 않았노라고 또 한 번 무겁게 조아린다. 이는 미래에 대한 의지. 



3. 영원회귀 비판

 

일찍이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이 '불분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한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확신. 보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확신. 즉 일어나야 할 것을 위해 일어난 것처럼 믿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의지'를 강렬히 가리키고자 했던 것으로, 개인적으론 해석한다. (나는 이 해석이 일단 표면적으로 오답임을 알고 있다. 이는 중요하다.) 'Muss es sein? Ja! Ja! Es muss sein!' 그것이 틀린 것이었을지라도? 그래,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허무한 각오였을지라도? 그래야만 한다! 오히려 믿음 만큼의 절망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며, 심지어 실패로서 정해져 있는 것이었더라도? 그래,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래야만 한다. 나아가야만 하기에. 내 무거움이 갚아야만 할 대가를 안고서, 계속해서 나아가기 위하여.


[1]
이 세상이 일정한 크기의 힘과 일정한 수의 힘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존재의 거대한 주사위놀이 속에서 계산 가능한 수의 조합들을 계속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무한의 시간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조합이 빠짐없이 한 번씩은 나타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무한히 여러 차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조합'과 다음번에 그것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회귀)' 사이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합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또 그 각각의 조합마다 전체 조합들이 일어나는 순서에 있어서 똑같은 조건인 만큼, 절대적으로 동일한 순서의 순환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유고』 中
[2]
시인이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자 우연의 구원자로서 나는 저들에게 미래를 창조할 것을,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것 전부를 창조를 통해 구원할 것을 가르쳤다. 인간에게서 과거를 구원하고 모든 "그랬었지!"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기를 나는 원할 것이다!"라는 의지의 외침에 이르기까지 변모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구원이라고 나는 저들에게 알려주었고, 그것만을 구원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
[3]
"오, 사람아!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또 끝날 것이다. ㅡ 네가 생겨난 모든 조건들이 세계의 순환 속에서 서로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사이의 위대한 순간의 시간, 그 다음에 너는 모든 고통과 모든 쾌감과 모든 친구와 적과 모든 희망과 모든 오류와 모든 풀줄기와 모든 태양빛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모든 사물의 연관 전체를 되찾을 것이다. 네가 하나의 낟알로 들어 있는 이 고리는 항상 다시 빛난다. 그리고 인간 존재 전체의 모든 고리 속에는 항상 어떤 순간이 있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단 한 사람에게, 그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생각, 즉 모든 것의 영원회귀라는 사상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ㅡ 인류에게 이때는 매번 정오의 순간이 된다.

니체전집 12 /KGW V 2, 11[148], p.498
[4]
최대의 중량 -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ㅡ 나무들 사이의 이 거미와 달빛, 그리고 이 순간과 바로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거듭해서 뒤집혀 세워지고 ㅡ 티끌 중의 티끌인 너도 모래시계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다! ㅡ 그대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그렇게 말하는 악령에게 이를 갈며 저주를 퍼붓지 않겠는가? 아니면 그대는 악령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엄청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너는 신이로다.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노라!" 그러한 생각이 그대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지금의 그대를 변화시킬 것이며, 아마도 분쇄시킬 것이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가?

니체, 《즐거운 학문》 341절



한편, 니체의 영원회귀를 논할 때마다 내가 자주 (혹은 일부러) 간과하는 것은 '회귀'가 아니라, 바로 '영원'이다. 이 "가벼운" 질문(모든 낱말은 가볍다, 제아무리 현란하게 까불어봤자), '영원회귀'가 인류의 정신에 있어 쉽사리 지워낼 수 없는 것, 대단한 무게로서의 의의를 획득하는 지점은 '반복'이 아니라 '영원한 반복'에 있었다. 이 질문의 공포는 그것을 여러 번 할 수 있겠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영원토록 할 수 있겠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 말 뿐인 "영원"이란 것을 진지하게 대하자면 말이다. 


그러나 영원, 그것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고 '영원히' 겪어볼 수 없는 것이므로 허망한 것이다. 인간에게 영원의 공포를 논해보아야 그 공포감에 대한 이해는 자기 경험으로서의 시간, 삶을 넘어서기 어렵고 아무리 양보적으로 어림해보아도 일생인 100년의 수 배를 넘어서기 어렵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꽤나 진중하게 고찰해볼 줄 아는 사람에게 그것은 대단히 중엄하고 두려운 '무언가'(그것이 무언가라는 점은 중요하다)이겠지만, 나는 이것을 요즈음 유행하는 '5억 년 버튼'의 일화에 대입하여 우화 愚化하곤 한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아무것도 존재치 않는 공간 속에서 철회할 수 없는 5억 년의 시간 속에 갇히나, 5억 년에 달하는 순간 모든 기억을 잊음과 동시에 물질적 보상이 주어진다고 한다면 그대는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나는 5억이라는 숫자를 모르기에(그것은 결코 감각할 수 없다), 내가 그 순간 느끼게 되는바 실존적 이해에 기반한 두려움은 엄밀히 말해 기껏해야 100년 안팎의 무언가일 테다. 5억이라는 숫자의 양적 규모를 엇비슷하게도 감각할 수 없는 우리에게, 그것은 5억이건 1억이건 10억이건 실질적 차이감이 없다. 그것은 뭐가 됐든 감각할 수 없는 무언가이고, 그것은 뭐가 됐든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선택하려는 사람이 존재한다. "인식하지 못하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인가? 어쨌든 인식하고 감각하는 여기 '실재'는 버튼을 누름과 거의 동시(찰나)에 물질적 보상을 획득한다. 그것이 5억이건 1억이건 10억이건, 심지어는 100만 원이건 상관 없다.   실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순식간에 100만원을 받아들며 머릿털이 쭈뼛 선 나는 버튼의 내구성이 다하는 순간까지 거듭하여 그것을 누르려 들 것이다. 심지어는 더욱 빠르게 누르려 할 것이다." 


100명 중의 10명이 선택하겠노라 말한다면, 그중 한 명 정도는 우발적으로 그 버튼을 누르는 사람일 테다. 그 사람은 5억의 무게감을 결단코 알지 못한 채로 그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인식할 수 없는 시간선 너머로 추방된다. 시간선이 이어져 있건, 이어져 있지 않건 두 주체는 결코 연속적으로 존재치 아니하고, 심지어 버튼을 누른 주체와 5억 년의 공허 속에 갇힌 주체는 서로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100만 원을 100만 번 수령한 그 사람에게, 그 5억 년의 운명은 무엇인가. 그 자는 자신의 선택이 내린 결정을 두고 무어라 부를 수 있겠는가. "Muss es sein?" 다시 그 무의미의 감옥 속에 갇히더라도 다시금 그리해야 하는가? (겨우 100만 원, 그것을 위하여?) "그게 무슨 소리야, 인식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여 내게는 영원회귀보다 이 5억 년 버튼이 훨씬 무시무시하다. 그것은 선택을 수반하기 때문이거니와, 무의미로서의 공포를 처절히 형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편, 100만 원씩을 100만 번 반복해 1조 원을 받아 챙긴 사람(결국 끝내 이 사악한 버튼은 망가지지 않은 채, 손이 먼저 부러지고 말았다)과 영원회귀자의 무게감이 얼마나 다른 무언가인가. 5억 년을 100만 번 반복해 500,000,000,000,000 년(5*10^14)을 개개 독립적인 무의미 속에 살아간 사람이 느낀 공허의 무게감과 영원회귀자의 그것이 얼마나 다른 무언가인가. '영원'이라는 것이 가벼운 낱말 안에 다 담길 수 있는 것이었을까. 



거대 개념과 영원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무한이라면 수는 얼마나 거대해져야 '충분히' 무한에 가깝다고 여겨질 수 있을까. 마치 1을 0의 수렴 값으로 나누면 무한으로 발산하고, 1을 무한의 발산 값으로 나누면 0으로 끝없이 수렴하듯이. 분모가 얼마나 작아져야 마침내 1이 무한이 되고, 얼마나 커져야 1은 마침내 0이 될 수 있을까. 불교의 1겁은 약 43억 2천만 년(4.32*10^9)이라고 한다. 무량대수는 10^68이고 구골은 10^(10^2)이다. 100년씩의 생애를 1구골, 즉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만큼 반복한다면, 그것은 영원회귀에 필적하는가? 그것은 무엇으로 선언될 수 있는가. 영원이란 필멸자에게 있어 허망한 것이고 허무맹랑한 것이다. 


니체식 영원회귀란 그 개념 정의부터 대단히 모호하지만, 위의 인용 [1]에 따르면 모든 물질이 질서에 따라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한다고 가정할 때, 만물이 일전에 일어난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일치할 모종의 가능성, 천문학적으로 미약하나 분명히 존재할, 한없이 0으로 수렴하는 그 가능성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벌써부터 '그것이 동일한 것인가, 감각 주체의 관점 하에서 그것은 모두 독자적인 것으로서 최초의 사건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발생하지만, 일단 차치하자.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다. (이는 니체 시대의 과학 상식과 우리 시대 과학 상식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이를 두고 니체를 비판하는 것은 조금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우주 종말의 이론 중 '빅 립'까지 남은 시간은 220억 년 (22*10^9)이다. 빅 립에 이르러 가속 팽창한 우주 내의 모든 물질과 원자 간의 인력이 붕괴하고, 시공간은 찢어져 버린다고 한다. 그때 재귀는 일어나는가? 또 다른 우주 종말의 이론 중 '빅 프리즈'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더 이상 인간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지경 (10^(10^120))이다. 빅 프리즈에 이르러 과잉 팽창된 시공간 내의 모든 열원과 중력원은 그 에너지를 소실하고, 우주는 거대한 공허가 되어 무엇도 빛나지 않는 차가운 절대영도(에 근접한)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블랙홀마저 먼지가 되어버린 머나먼 시간선 아래, 그때 재귀는 일어나는가? 어쩜 모든 것은 단 한 번뿐인 것이 아니었을까? 


또 한편, 엔트로피 법칙을 따라 우주로 흩어지는 모든 물질들이 우연히 한 점으로 돌아와 다시금 우주가 시작될 수도 있다면, 거기 소요될 시간인 '푸앵카레 재귀시간'은 10^(10^(10^(10^(10^1.1)))이라고 한다. 아주 긴 시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거쳐 모든 것은 일전에 일어난 것과 동일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론.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우주가 유한한 공간이며, 그 안의 경우의 수가 유한하다는 전제 하의 추론. 만약 우주가 끝없이 팽창하며 다시는 수축하지 않는 열린 시공간이고, 그 팽창 한계가 무한이라면 완벽한 재귀는 불가능한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생각된다. 여전히, 만약에 그것이 일어나 영원에 한없이 가까운 재귀시간을 거치고도 130억 년이 또 지나 지금 이 순간,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의 시간, 우주적 찰나가 재현된다면 그건 최초의 사건과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긍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이상 비판의 고찰은 무의미할 것 같다. 이렇듯 영원이란 가상이자 개념이고, 말뿐인 허망함이다. 적어도 그것을 실천 영역에서 논하자면 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비판에도 불구, 그 사상을 이상 사실적 근거로 평가절하하기란 우스운 일이다. 적어도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아예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인용 [2], [3], [4]) 우주적 시간 관념 하에서, 삶을 포함한 모든 것의 생멸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어떠한 것은 무엇으로 그 고유한 의미, 한 번뿐인 것으로서의 유일성을 획득할 수 있겠으며,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라든지 현상적 의의를 차치해두고서라도) 그것을 천명하고자 하는 우리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의지는 그야말로 영원 속으로 흩어질 무언가가 아니이냐. 내게 영원회귀란 이런 조소 어린 질문을 낳게 하는 것이다. 


'영원히 회귀하는 우주적 관점 하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시 같은 태양의 시간 아래, 정확히 똑같은 순간을 거쳐 재현될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최초의 사건인 것처럼 발생할 것이다. 오직 신이 있다면(죽었지만) 그만이 홀로이 아실, 완벽히 순환하는 세계선이 그 순간 최초의 우연을 가장하며 무한히 나타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회귀하는 세계관 아래에 완전히 의미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의미라는 것이 독자성과 유일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므로 확신, 완전히 의미 있는 것에 대한 열망이란 허망한 것이고, 그에 따라 그 그림자인 염세도 우스운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애초에 확신은 무엇이었던가. 이토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무한히 반복되고 재생산되는, 이미 무수히 반복되었을 존재의 순간에 대함이 아니었던가! 확신 그 가벼움, 그렇다면 그 그림자인 염세 또한 마찬가지 태양 아래 산화하는 먼지처럼 흩어져버려야만 한다. 우습게! 마치 이 모든 것을 미리 다 알고 있는 그 존재에게 비친, 살뜰한 인간들의 유일 신앙, 그 해학처럼. 도리어 그것이 존재의 발목을 잡아 운명을 고사시킨다면, 그건 대단한 우주적 해학이다.' 니체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나는 영원회귀를 논할 때마다 자주, 또 일부러 '영원'을 간과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과업에 대한 개인의 태도를 실천 영역에서 논하자면, 그것은 반드시 불가한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되어 있기에 논할 가치가 없는 무언가로서 이미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것을 진지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불가하다고 선언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공허라는 발산 값에 필연이 수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영원회귀에서 '영원'을 부러 간과한다, 실천 영역에서는 영원을 논할 수 없기 때문에. 다중회귀, 회귀하는 삶의 관점, 운명에 대한 내 태도는 딱 그 정도로 우화했을 때에나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그에게 동의하는 것이다. 




저 사람이 굳이 '영원'을 끌고 와야만 했던 까닭이랄 게 있다면 인간에겐 염세와 허무라는 덫이 있었고, 그것이 가지는 무게가 그만큼 지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그 정의에서부터 모호하기 그지없는 철학이고, 그것이 실질적 의미를 획득하는 지점은 '영원'이라는 과장된 공포를 통해 현재의 염세를 불식시켜버리는 것에 있었노라 생각한다. 


저 확신에 찬 미친 자, 광기와 사랑의 철학자의 목소리가 활자 너머 들리오는가? 확신, 허무, 그 다음은 더욱 커다란 확신! 주어진 것이 아닌 마침내 결정한 것으로서의 자기 확신. 필연적 감각에 기인한 모든 결정(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  운명에 대한 긍정과 전적으로 주체가 되어버리는 삶. 이런 온갖 무거움을 고래고래 부르짖는, 사랑스럽고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저 사람의 목소리가? 니체는 말년에 정신이 붕괴하여 미쳐버린 채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정신으로 죽인 '신'을 자처하였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어느 날 광장 가장자리에서 한 마부는 말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있었다. 니체는 '멈춰!'라고 말하고는 말의 목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발광하다간 실신했고,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 철학가의 졸도를 목격한다. 그는 하숙집 주인에 의해 집으로 옮겨진다. 


무거움의 화신, '도달할 수 있는 최대 중량'이라는 확신에 찬 미치광이, 사랑스러운 미치광이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그는 자신의 무거움, 어쩌면 다 실현할 수 없었던 그 무거움을 관철하다가 미쳐버린 것은 아니었을지.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서 그 무거움을 다 안아 들기 전에 미쳐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을런가. "영원이라는 도달할 수 있는 최대 중량" 아래에 그의 존재는 짓눌려버린 것은 아니었겠는가, 다만 비참하고도 끝내 영광스럽게. 자기 자신이 뱉은 말, 최대 중량의 의미를 내포하면서도 한없이 가벼운 낱말들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는 자기의 몸을 던져서 그 틈을 메꿀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몸으로서 관철하기 위해, 그는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으리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그 끝없이 고단한 관철하는 삶에 짙고 깊은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가 있었나, 불멸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우주적으로? 그럴 수도, 혹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그러니 쿤데라가 영원회귀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이는 소설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질문이자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의문이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쿤데라가 소설 초반에 언급한 영원회귀와 그에 대한 태도는, 이 영원에 대한 포기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었더라면, 우리는 그것, 도달할 수 있는 최대 중량의 무언가를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어차피 존재는 무한과 영원 앞에 두 손을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영원의 공허와 무게를 충분히 인식한 존재에게, 결코 저항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에게 이제 그 영원이란 무엇이 되는가. 그대는 우리가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려 드는가? 왜, 왜 그래야만 하는가.' 영원에 대한 필연적 불가항. 그건 내가 앞서 영원을 우화해야만 했던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4. 마치며


아이고, 쓰는 처지로서도 글이 피곤하기가 말이 아니다. 이게 다 무겁게 써서 그렇다. 가벼움을 노래하기 위해 시작한 글은 그야말로 무거운 것이 되어 버렸다, 딱히 의도한 것도 아니이다. 그러나 가벼움을 노래한다는 것이, 반드시 가볍게 노래함을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가볍지 않게, 퍽 진중하게 불러보고 싶었다. 가벼운 노래는 굳이 수고를 들이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익히 들려오는 것이기에. 느닷없이 이는 바람이 귀밑을 툭- 치곤 그냥 지나가 버리는 듯이. 


동생이 방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뭐해?" 나는 글을 쓴다고 답했다. "이번엔 또 뭘 쓰는데?" 한 소설에 대해 글을 쓰노라고 답했다. 그리곤 조금 부연설명을 곁들여 보았다. "에잉- 머리 아프게 스리… 체력도 좋다." 그녀는 늘 그랬듯이 이렇게 답했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가벼운 노래라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가볍게 불러본다는 것은 이렇듯 간편하고 뻥- 뚫리듯 속 시원한 일이며, 참으로 간단 명쾌한 행동이다. 그것이 그 가벼움의 의의이자 보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뭐하러 나는 또 이런 글을 쓰나-' 싱겁게 웃으며, '넌 참 좋겠다'는 눈으로 잠깐 바라보았다. 


쿤데라의 소설도 내 눈엔 매한가지이다. 그건 가벼움의 노래이나 결코 가볍게 쓰인 글이 아니고, 그래서 여럿 독자로 하여금 신경성 편두통을 자아냈다는 사실은 퍽 우스운 일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작업이 그렇듯이. 여하간 나의 글이 그 무게로 말미암아 부담스러워지는 것은 언제나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깊숙한 무관심, 활자들의 무덤 위에 덤핑되듯이 방치된다 하더라도, 나중에 책의 기억이 다 하였을 때 나 혼자는 꺼내볼 수 있으려니. 아무렴 책을 다시 읽는 것보다는 이쪽이 가벼운 일일 테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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