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풍금이 있던 자리 May 13. 2024

[Review] 봄 처녀 제 오시네

코리안 트럼펫터 앙상블, 제8회 정기연주회




5월이 하 중순이로구나. 시간이 너무 빠르다. 겨울 지내온지가 엊그적 같은데 5월이라니, 봄도 이제 다 가렷다.  봄이 너무 짧은 겐가, 내 너무 미련함이었던가. 조금 누려볼락 하면 가는 것이, 해마다 나를 아쉬움에 떨게 하였지. 실로 짧았다 하더라도, 그보다 곤란한 것은 사랑과 미련이었으려니. 그러나 이번엔 어인 일인지. 이제는 갔겠지, 하마 갔겠지, 하며 꼽아본 나날이 벌써 세 손 꼬박이니다. 이즈음이라 하면 벌써 더워지는 마련이더니만, 언제나 짧게 스치어 간질이곤 긴 여운이던마는, 아직 바람이 푹시리 다정한 것이 미리 죄어놓은 마음을 와르르 푸지게 하였다. 이번 봄은 참말로 더디 가려함이나. 참 좋은 절기에 바람이 부나니, 내 마음이 하냥 좋으니다. 


하하, 심히 들떠서 부러 말을 옴팡지게 했구나. 12일 일요일엔 국립극장을 왔다. 남산 허리, 장충동 높은 곳에 양지바르고 너른 터가 있어, 국립극장이 거기 알짜배기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극장 들어서고도 넉넉한 주변으로는 공원이나 분수 같은 것을 아기자기하니 만들어두었는데, 신라호텔이 보이는 쪽 방향 끝자락으로는 가파른 경사 바로 위편 등나무 아래로 벤치가 여럿 놓여있다. 내가 참 좋아하는 곳, 경치가 시원하게 트여 좋다. 공연 2시간 전, 부러 일찍 온 탓에 인규 에디터와 재훈 에디터를 하염 기다리며, 등나무 그늘 아래에서 봄 구경을 좀 한다. 문화초대 하기 전 뜨는 시간에는 미리 서문을 써두는 버릇이 있는데, 그래서 오늘 서문이 봄이렷다. 





당일 오전에는 대학 동기 두 놈이 결혼을 했더랫다. 1학년 1학기에 눈 맞은 캠퍼스 커플이 11년만에 드디어 결혼을 한다라. 다른 동기들은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닌 게 아니라 둘이 함께 보낸 시간의 아뜩함에 물론이었겠지만, 그 둘은 천상 배필인 것 마냥 찰떡처럼 어울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참으로 닮았다, 처음부터 그랬어, 마치 둘이 만날 운명이었던 것 마냥. 첫눈에 누가 보아도 저놈 짝은 이 계집아이고, 이 계집아이 짝이 저 총각이었다. 동그만 얼굴에 유순하고 모나지 않은 눈시울,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이는 것이 처녀 총각이 쌍으로 참 고왔다. 이 사랑스럽고 어린 부부가 결혼을 한다라니, 동기 놈들 전부 다 모여 둘을 축복했다. 


사내놈은 어지면서도 영민한 것이 서글서글한 여우를 더 닮았고, 계집아이는 새근새근하고 차분한 것이 토끼를 닮았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동기들이 이 말에 크게 맞창구를 쳐 주리다. 여느 때처럼 빼입은 새신랑이 먼저 식장으로 들어섰고, 이윽고 신부가 들어온다. 이제 와 드는 생각이지만, 그 모습이 참 봄 처녀 같더라. 그래, 그 가사처럼.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 위에 하얀 구름 너울 쓰고, 꽃다발 가슴에 안고서', 식장에 들어선 그 친구가 참 보기에 아깝도록 고와 어딘가 서글펐다. 오해는 마시라, 추호 연정 비슷한 것도 아님이니, 그보단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알게 되는 속절없는 느낌. 부러움일까, 그보다는 따스한. 환희일까, 그보다는 쓸쓸한. 알 수 없는 기분, 행진하는 두 사람의 어여쁜 뒷모습에 대고 조금은 더 오래 손뼉을 쳤다. 여차여차하여 결혼식장을 나선 뒤로 조금 일찍 극장 변에 도착해, 나는 이렇게 서문을 쓴다. 




서문을 봄으로는 뗐는데… 이걸 금관악이랑 어떻게 엮어 들여야 할지는 도저히 모르겠군. 조금 고민하다 치우기로 한다. 그래, 그게 봄이랑은 상관없는 것이지. 클래식 콘서트 초대가 오면 웬만큼 신청하는 나였지만, 개중에서도 유독 금관악을 좋아해 왔다. 건반도 목관악도 애호하고, 비록 현악은 그 자체로만 두고 보았을 때는 크게 흥미가 없어서 콰르텟이나 솔리스트 공연은 찾질 않게 됐다지만, 그럼에도 오케스트라 편성의 꽃이 현악이라는 것을 충실히 긍정한다. 하지만 금관악만이 가지는 중후장대한 맛이 있어, 나는 이 수상한 편애를 궁금해 해왔다. 이번 트럼펫 앙상블은 내가   찾아오게 될 예정이었던 것. 그래, 이게 봄이랑은 상관없는 것이지. 


금번 '코리안 트럼펫터 앙상블'의 정기연주회 표제는 '가정의 달'이다. 5월에 진행하는 콘서트라서 그런가. 올해로 벌써 8회째의 정기연주회인데, 해마다 공연을 진행해오고 있었다. 팸플릿을 살펴본다. 호른, 트롬본, 튜바 소수가 베이스 파트를 맡고, 역시나 메인 파트는 트럼펫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파트 연주자의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는데, 어, 솔찬히 구수한 냄새가 난다. 딱 우리 큰외삼촌 냄새 같은. 비록 선입견이라지만, 모름지기 프로 연주자들이라면 때 빼고 광내고 쫙 빼입고서는 조명도 적당히 갖춘 채 프로다운 포즈로 사진을 찍는 것이 인지상정이겠는데, 마치 맨 위에 걸어둔 사진처럼. 허나 사진에 담긴 연주자들의 모습이 구수하고 담백한 것이 몹시 가깝게 느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tIXlHrBtBnI



'코리안 트럼펫터 앙상블'은 국내 최대 규모의 금관 앙상블 단체이다. 양행효 단장을 필두로 20대부터 70대까지, 전문 연주자에서부터 순수 아마추어까지 폭넓게 구성했다. 순수 비영리 단체로, 국내에선 최초로 100인 규모의 트럼펫 앙상블을 결성했다고 한다. 연주회마다 신인 유망주 및 정상급 솔리스트들과 협연키도 하는데, 이번에는 아주 특별한 손님을 모셨다. 최정상급 성악가인 김동규 바리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널리 알려진 유수의 인물이 이번 공연을 보다 특별하게 했다.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 PROGRAM *


[1부]


C. Orff - O Fortuna from Cantata

[Carmina Burana]


J.B. Arban - Fantaisie Brillante

* Trumpet 손장원


OST - Gladiator


Medley - Disney Fantasy



[2부]


J. Bocook(arr.) - Narco


홍난파 - 봄처녀 

* Baritone 김동규


S. Cardillo - Core 'ngrato 

* Baritone 김동규


그대향한 사랑(앵콜) - 김동규

* Baritone 김동규


Medley - Latin Pop Special


Musical OST - West Side Story




곡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감상평을 늘여놓는 건 피곤하거니와 크게 유용한 일은 못 되는지라, 개중 가장 좋았던 곡 이야기를 해야겠다. 김동규 바리톤이 무대로 등장해, 능숙하게 아이스브레이킹과 곡 소개를 진행하던 때였다. "봄 처녀, 아,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곡이죠. 특히 이번엔 관악으로만 연주되는 게 정말 멋있어요. 한 소절만 들어보실래요?' 그렇게 곡은 느닷없이 시작했다. 한 소절 맛보기인 줄 알았는데, 이런 능란한 사람. 그러나 미처 준비하지도 못한 채 단숨에 나는 사랑에 빠진다. 어쩜 너무 좋고 좋은 사랑, 하여 미련하게 만드는. 


트럼펫이 쨍하게 떠오르는 금빛 여명을 떠오르게 한다면, 플루겔 혼의 음색은 아침 안개 같다. 트럼펫이 독수리의 부리처럼 예리하다면, 플루겔 혼은 벌매의 눈처럼 동그랗다. 안개처럼 촉촉하니 퍼지는 듯싶으면서도 관악 특유의 뭉근하고 끈적한 선율로, 가곡의 서문이 열린다. 그리움의 정서, 유년에 대한 그리움이거나 첫사랑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또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에 대한 답답하고 황홀하며 어지고 서글픈 느낌 같이 묘묘한. 그래, 봄 처녀에 대해 그러할 테고, 봄에 대해 내가 그러했듯이. 



https://www.youtube.com/watch?v=wvfvKnULwYM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바리톤의 깊고 돈후한 음색이 관악과 닮아서 서로 어울린다. 마치 원래 제 짝이었던 것 마냥, 만나야 했을 운명이었던 것 마냥. 상기 영상 속, 현악으로서는 차마 다 그려낼 수 없었던 눅진하고 깊은 감정을 관악은 형상화한다. 아,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좋겠어. 귀를 씻고 눈을 부릅뜬 채로 만났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긴장하지 않은 채로 맞닥뜨린, 하여 눈 뜬 채 놓쳐버린 버스와 같이 멀어져 간 그 선율이 너무 아쉽다. 허나 봄이 가고 난 다음에 미련일랑 무용하듯이, 대신하여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봄이다, 토요일에 내린 거센 비바람이 이 좋은 봄을 조금 더 연명시켜주었다. 왜 이렇게 좋은 것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기분이 들곤 하는지. 허나 그것이 버리고 떠나올 슬픔이 아닌 까닭은, 하여 오롯이 누려볼 만한 이 봄만의 감각인 까닭은 실상이 감미로움이기 때문일 테지. 비애같이 달콤한, 고독처럼 감미로운, 역설적인 감정. 너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랑을 오롯이 누려보기도 전에, 미리 올 이별을 슬퍼하는 일이 사람에겐 있더랫지. 허나 나는 그 감정이 참 좋아. 어쨌든 아직 봄이고, 봄은 내 미련과 걱정에 무관히 이미 여기 있던 터이니. 


지휘자이자 음악감독인 임우일 트럼펫터의 유튜브 채널에 매해 앙상블 영상이 편집되어 올라온다. 이번 연주회 영상이 편집되기까진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후에 꼭 한번 찾아 들으셨으면. 그리고 봄이 또 오듯이, 이들의 정기연주회가 다시 우리를 찾아오겠지. 비록 금번 공연에 대해서는 하나의 곡만으로 조망하여 미진함이 있겠지마는, 이만하면 내 사랑을 충분히 펼쳐 보인 데는 성공했지 싶다. 이상, 코리안 트럼펫터 앙상블 제8회 연주회, 지극히 개인적인 후기 마친다. 오늘의 공연일기, 끝. 



작가의 이전글 [Review] 아베 마리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