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지는 이맘때면 아이들은 의례 한 두 차례 감기에 걸린다. 스위스 의료비가 비싸다는 것은 워낙 잘 알려진 사실이고, 한국을 벗어나면 어느 나라를 가던 그만큼의 의료서비스를 기대하기 힘들기에 웬만한 아이의 콧물, 가래 정도로는 소아과를 잘 데려가지 않는다. 다만, 이번 감기는 기침이 길어지면서 폐렴으로 이어질까 걱정되어 평소 아이를 봐주는 소아과 선생님께 진료 예약을 하였다.
진료 예약부터 난관이긴 하나, 나는 독일어로 전화 예약할 자신도 없을뿐더러 동네 아이들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소아과 때문에 보통 전화연결이 잘 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항상 예약을 위해 직접 방문한다. 금요일 문 열자마자 찾아가 예약을 했으나, 주말을 지나 월요일에나 진료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마저도 안 해주려는 분위기에 빨리 예약을 잡았다.
진료 예약증: 항상 먼저 예약을 하고 방문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의 증상을 몇 가지 물어보더니 메모지에 찾아가야 하는 약국이름과 처방약 두 가지를 적어 주셨다. 아무리 봐도 Official 한 것 같지 않은 이 종이를 여러 차례 확인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처방전(Official prescription)이라고 하였다.
의사 선생님이 쪽지에 손으로 적어준 처방전
한국은 의약분업화 이후에 빠르게 자리 잡은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이런 종이쪽지를 사용하는 곳이 있을까 싶은데 너무나도 아날로그 방식이 적잖은 충격이었다.
병원 주변의 많은 약국을 다 두고, 소아과 선생님이 적어준 그 약국을 찾아가서야 왜 꼭 그곳이어야만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선생님이 처방한 약은 그 약국에서 직접 만든 약이어서 그곳에서만 파는 것이었다. 한국과 달리 스위스는 약국 자체에서 피부연고나 시럽약 등을 제조하여 판매할 수 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약을 직접 제조하는 약국은 근무하는 약사님들의 수도 많고 그 안에 실험실과 조제 시설을 갖추고 있어 처음에는 그 모습이 굉장히 신선했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약방에 가면 한약재료가 종류별로 나눠져 보관되어 있는 나무서랍통에서 약사님이 약재들을 꺼내어 다려주었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왠지 그런 느낌이랄까.
그 약국에서 제조한 코뿔소(Rhino) 어린이 감기약
제약산업(Pharmaceutical industry)이 고도로 발달한 스위스에서 우리나라의 90년대 감성과 비슷한 광경을 보고 있자면 재밌기도 하고, 참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생소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살아도 삶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세상은 문제없이 움직이는구나... 문제없이 흘러가는 삶이란 꼭 효율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운다. 작은 불편 속에서도 삶은 그 자체로 유유히 흘러가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안정감은 또 다른 형태의 삶의 지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