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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폴스 Feb 03. 2021

소모품과 비품 사이

함께 사용하는 학습준비물실

  기업에서 사용하는 물건은 소모품과 비품으로 나눌 수 있다. 비품은 유형 자산으로 책상, 컴퓨터 등이 있고, 소모품은 볼펜이나 A4 등이 있다. 학교도 마찬가지로 비품과 소모품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비품과 소모품 사이에 애매한 물건인 수업 교구가 있다. 교구는 교육에 사용되는 도구를 말하는데, 예를 들어 수학 시간에 활용하는 쌓기 나무나 다면체 모형이 있다. 과학실 하면 떠오르는 인체 모형도 교구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은 이런 교구가 다양해지고 세분되고 있다. 수업을 도와주는 교구이지만, 기한은 짧다. 쌓기 나무나 다면체 모형, 인체 모형은 딱 그 단원에서만 사용되고, 그 외의 시간에는 거의 쓸모가 없다. 그러다 보니 이미 쓸모를 다한 교구들은 교실에서 방치되거나 사용될 그 날을 기다린다. 아깝고 비효율적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렇게 교실에 모아두는 이유가 있다. 


 학교에는 연구실이 있는데, 학년별로 선생님들끼리 회의를 하기도 하고 학습준비물로 구매한 공용물품을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연구실에 있는 수채화 물감과 붓, 팔레트를 각 반 선생님들의 시간표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용하면 참 좋겠지만, 실제로는 학년 연구실의 물품은 잘 관리되지 않는다. 공용으로 사용되고 담당자가 없다 보니 물품을 가져가서 바로 반납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대여 후 제대로 정리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다 쓴 것은 버리고, 새로 채워야 하는데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또한 해가 넘어갈 때마다 인수인계가 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번거롭게 공용 물품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교실에 작은 창고를 만드는 것이다.  



 2017년도에 하노이 한국 국제학교에서 근무했었는데, 그 학교에서는 전 학년 공동 학습준비물 교실이 있었다. 전 학년의 교구가 한 교실에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으니 학년마다 각각 주문해 낭비되는 일이 적었고, 다른 학년에서 사용하는 교구들이 있어 다양한 교구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학습준비물 교실을 관리하는 전담 인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비해 저렴한 인건비가 장점인 베트남이었기에 재정 문제없이 관리 인원을 뽑을 수 있었다. 관리 인원은 학습준비물을 정리했고, 교실을 깨끗하게 청소해 사용하기 편하게 교실을 관리했다. 고양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회가 학습준비물 교실을 관리하는 사례도 있다. 교사가 전날에 필요한 학습준비물을 메신저로 보내면 준비해 놓는 식이다. 학교에서는 적은 돈이지만, 봉사하는 학부모에게 임금을 준다. 학용품이 없는 학생들은 여기서 물건을 사기도 하는데, 학부모가 교육 활동에 참여하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전담 인원이 있어서 관리해주는 행정적 지원이 있으면 좋겠지만, 지원이 없더라도 교사들이 노력하면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사용하는 선생님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낭비를 줄이고 함께 사용하자는 취지에 함께 공감하면 시작할 수 있다. 


 같은 학년 선생님들과 인사하며 이야기했다.

 

 “오늘 이사하면서 보니까. 교실에 자주 안 쓰는 물건들이 많더라고요. 다 같이 공용으로 사용하고 책임감 있게 관리해보면 어떨까요?”

 “좋아요.”

 “그럼 교실 정리 전에 연구실 정리부터 먼저 할까요?”     


 같은 학년 선생님들은 흔쾌히 동의했고, 바로 연구실을 정리하기로 했다. 기존에 있던 물건들의 수량과 상태를 파악해 과목별로 정리했다. 품목을 적은 라벨지를 붙여 위치가 혼동되지 않도록 했다. 1학기에 하려고 했던 미술 수업에 필요한 수채화 물감과 붓, 팔레트, 아크릴 물감이 있었다. 도화지는 1학기에 구매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넉넉하게 있었다. 함께 정리하지 않았따면 있는지도 모르고 또 구입하지 않았을까.


 연구실이 정리되자 이제 내 교실에 쌓아놨던 짐을 정리할 차례였다. 최소한의 필기구를 제외하고, 소모품과 교구를 모두 연구실로 옮겼다. 6박스나 됐던 짐 중 교실에 남은 건 한 박스도 채 되지 않았고, 5박스는 모두 연구실로 옮겼다. 


 마음이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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