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슈슈 Oct 23. 2022

내 오랜 친구

마귀에게



“너 이 녀석 마귀가 들었구나”

진짜 마귀가 들린 것은 아니고.. (구) 천주교인들로서 그냥 상대가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아쉬울 때 하는 헛소리다.

오늘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너도 오늘 과천으로 바람 쐬러 가자”

“아니 나는 오늘 집에서 쉴래.”

“니가 오늘 마귀가 들었구나”


너무 어처구니없는데 너무 웃겨서 끽끽 대고 웃으면서 외출하는 가족들을 배웅했다. 그렇게 가족들을 보내 놓고도 빈 집에서 혼자 너무 웃겨서. 이 마귀랑 같이 아침 다이어리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프랑스어 공부도 하고 점심도 챙겨 먹고 가족들 돌아오면 먹을 식사 준비도 하고 설거지도 해놓고. 이런 마귀라면 꽤 괜찮은데?


가족들이 돌아왔고 나는 ‘마귀랑 같이 짜장을 만들었으니 짜장밥을 먹으라’고 권했다. 혈육은 냉면을 먹고 와서 짜장밥을 먹는 대신 _마귀랑은 아직 안 헤어졌냐고, 그래도 수십 년을 같이 지냈는데 그렇게 막 박하게 이별을 고할 수 있겠냐고, 그래도 한 번은 얘기해야 되지 않겠냐고, 흙바닥을 운동화 코끝으로 툭툭 치면서 떨어진 낙엽을 서로의 눈 대신 쳐다보며 ‘알아, 알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런 대화를 견딜 수 있겠냐고_ 따위의 얘기를 나와 나누었다.


나의 마귀. 마귀.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 이야기를 자주 떠올린다.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 중 누가 힘이 셀까? 내가 밥을 많이 준 늑대다. 나에겐 마귀도 있고 천사도 있을 거다. 물리적인 시간으로만 따지면 우울한 시간들이 더 많았을 테니 나에겐 마귀가 힘이 세겠지.


그치만 마귀가 있어서 내가 삶에 얼마나 간절한지 마귀가 잠든 시간을 얼마나 열심히 살 수 있는지도 알게 된다. 그래서 마귀가 밉지만 그래도 영영 날 떠날 것 같진 않아서, 그냥 유전자에 흐르는 것 같아서 그러면 잘 데리고 사는 쪽이 좋지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곤 하지만..


그래도 소망하는 건 나의 오랜 칭구 마귀가 나를 온전히 떠나는 일이긴 하다. 귀여운 나의 오랜 친구야. 요즘 외출이 잦아 고맙게 생각해. 언젠간 아주 먼 데로 긴 여행을 떠나도 좋아. 내가 너를 잘 보내줄 수 있도록 매일매일 준비할게.






#단정한100일의반복

#안뇽

#믿음소망사랑

#소망




작가의 이전글 내 머릿속의 전지현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