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469일 차
아침 조깅을 하며 MET에 들러, 폴 세잔 작품 몇 개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폴 세잔에 빠지게 된 계기는 MOMA다. 원래는 MOMA에 갈 때마다 그나마 이해가 가는 작품들이 있는 (현대 미술이 아닌 근현대 미술들이 있는) 5층을 향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폴 세잔 정물화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보면 따뜻하고 평화롭고 몽글몽글한 기분이 든다.
엊그제 친구네 커플과 MOMA에 갔을 때도 특별전의 폴 세잔 정물화가 마음에 깊이 남았다. 혼자였음 한참을 봤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오늘 MET에 있는 폴 세잔 작품들을 찾아갔다.
갤러리 826은 폴 세잔 작품만 15점 정도 모여있다. 개관하자마자 그 전시실을 찾았더니 관람객이 나밖에 없었다. 한국이라면 한 작품만 있는 전시라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할 텐데, 엄청난 호사였다.
당연히 정물화부터 찾았는데, 아무래도 MOMA 특별전에서 본 정물화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서 그런지 감동이 덜 했다. ‘역시 꿩 대신 닭은 아닌가 봐…’하면서 풍경화나 인물화도 보는데… 또 다른 발견이었다.
풍경화나 인물화에서는 정물화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작가의 감상이 깊게 배어 있었다. 남부 프랑스 마을을 그린 한 작품에서는 건물에 쏟아지는 빛은 마구잡이로 흰색을 칠해서, 흩어진 옅을 구름은 낙서 같은 붓질로 표현했는데 그게 오히려 그림에 현실감을 부여해 줬다. 10여 년 전 여름 남프랑스 작은 마을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햇빛이 건물들에 부딪혀 부서지던 게 갑자기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림을 그린 대상물도 마음에 들었다. 물가에서 한가롭게 노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된 그림 한쪽에는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놀고 있었다. 옛날 정통 서양화에서는 별로 본 적 없는 소재고 그림에서 아이들의 신남이 느껴졌다. 아이들이 뛰놀고 엄마들이 그 옆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이 너무 나의 일상 같아서 와닿기도 하고 ㅎㅎ 정물화도, 남부 프랑스의 풍경도, 이런 풍경도 다 내가 좋아하는 소재다.
폴 세잔의 정물화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폴 세잔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MET 방문의 수확이다.
미술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기왕 뉴욕에 있으니 나를 미술작품들에 많이 노출시키려고 했었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그림을 보는 묘미를 알게 되었고, 좋아하는 미술관과 작품들이 생겼고, 좋아하는 작가까지 생겼다! 나의 작은 프로젝트 하나를 완성한 느낌이다.
이렇게 아침을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있고, 조깅하며 MET을 들를 수 있는 위치에 살고 있고, 좋아하는 미술 작가와 작품들이 있어서 참 좋다.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었어서 감사하다.
(사실은 ‘벌써부터 폴 세잔 그림들이 너무 그리울 것 같다.’라고 썼다가 위처럼 고쳐 썼다. 이렇게 쓰는 게 좋은 것 같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