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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연속

내게 남은 기억은, 무수히 반복되어온 부모님의 일

by 공존

"아유 잘한다! 장비 그렇지 그렇게 생겼지."


세살 쯤부터 나는 서점에 붙은 단칸방에서 자랐다. 글을 알기 전부터 집에 놓인 무수히 많은 만화책들을 펴고 놀았다. 아주 자연히, 만화를 그리고 노는 서너살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한 시절은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로봇 삼국지>라는 만화, 80년대까지 널리 사랑받던 명랑만화의 한 작품이다. 로봇이면서도 코도 길쭉, 새까만 수염이 얼굴을 뒤덮은 개성 강한 장비의 얼굴과 뾰족뾰족한 머리모양을, 나는 열심히 따라그렸다. 밤이 되면 온 가족이 단칸방 바닥에 이불을 깔기 시작한다. 나는 만화책과 노트를 가져와 또 로봇삼국지의 장비의 얼굴부터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내 그림을 바라보면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터지기 시작하고, 뿌듯한 나는, 그림을 정말 좋아하게 된다.


이 기억이 내가 쥐고 있는 가장 깊숙한 어린 시절의 한 자락이다. 이리 저리 생각을 해봐도 이보다 깊은 자락을 찾기 어렵다. 보다 어릴 때의 흔적도 있지만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으로, 시기까지 대강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다섯살 시기의 몇가지 기억만이 사진처럼 뚜렷한데, 노트 위, 로봇 장비의 검은 수염을 펜을 박박 굴려가며 그리는 장면. 그런 다음 관우와 유비의 얼굴을 차근 그리던 장면.


지금까지 나는 이 기억이 유독 진하게 남아있는 것에 대하여 "내가 그림을 좋아하게 된 날"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질이 있었다. 다섯살 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나는 그림을 퍽 잘 그렸단 말이다. 그러므로 이 기억에 기대어 나는 초등학생 때에도 중학생 때에도 또 나이를 먹은 지금까지도 그림을 좋아하고 또 어지간히 잘 그린다.


그러나 이제 다섯살이 된 딸을 기르며, 기억에 대한 나의 해석이 전혀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러나 "소질이 있던" 아빠에 비해서는, 또 덜 활달하고 얌전한 친구 아이에 비해서는 그림을, 잘 그리는지는 모르겠다. 아빠가 아무리 눈 코 입과, 동그란 얼굴을 그리는 것을 알려주어도 너무 더뎠다. 나는 7월 생으로 딸보다 세 달 생일이 빠르니 그렇다 쳐도 이제 8월도 다 지나간다. 여섯살이 되기 전까지는 좀 아빠가 로봇삼국지 그리던 만큼은 실력이 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 물론, 지금도 차차 실력은 나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빠처럼 딱! 모나미 볼펜 하나 가지고 만화가처럼 딱! 하는 그런 모습을, 다섯살 때쯤은 보여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다. 하루 아침에 내 손은 무르익었을까. 과연 내가 우리 딸아이처럼, 어디 되다만 동그랑땡을 대강 그려놓고, 눈코임을 직 직 한쪽에 그셔놓고, "잘 그렸지" 하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그려놓은 유비, 관우, 장비를 보고 몇번이나 놀라고, 박수를 치는 시늉을 해주셨을까. 아마도 내가 볼펜을 제대로 잡기도 전, 주먹쥐기로 펜을 들고 노트의 종이 끝까지 죽죽 낙서를 하던, 그때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들인 나에게 기억은 가장 의미있던 한 장면이다. 그 기억에 기대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것을 이해한다. 그것을 바라보던 부모님에게 기억이란, 모래사장 위의 파도처럼 단 한순간도 쉬거나 멈추지 않는 것이다. 수십 수백의 칭찬, 감탄, 박수가 반복되는 인내의 시간이 감정의 모래알이 되어 집안에 쌓인다. 철썩, 한번의 큰 파도만이 자식인 내 기억에 남았지만, 그 파도는 처음부터, 멈추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 기억을 마음 속 액자 맨 아래 칸에 걸어두기 전까지 부모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내 곁에 존재했다. 기억은 그러한 연속선상에 존재한다.


"이게 나래 엄마 엄청 웃겨."


휴양림에 가 보낸 하룻밤에, 샌드아트 체험기구가 있어 위풍당당하게 나는 아내에게 카메라 앱을 켜라고 했다. 내 주먹에서 스르르 새어나온 모래가 순식간에 딸의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봐라 이 아빠가, 여전히 이쯤 한단다. 아니, 지금도 더 나아지는 중이란다.


나의 기억은 이제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딸의 기억은, 지금은 이 선 위에 찍혀지는 점이다. 점, 점, 점. 그렇게 모아지는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의 선이 될 때 딸아이는 이제 영영 아빠의 품으로 돌아오지는 않는 사춘기 소녀가 될 것이다. 그렇게 각기 형태를 갖춘 두개의 선은, 아빠와 딸, 가족이라는 하나의 교차점만을 남기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궤도로 향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그렇게 우리의 교차점이 다가오기 전에.


나는 아이에게 어떤 기억들을 남겨줄 수 있을까. 어떤 감정, 자부심, 정체성의 밑그림들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 이 순간은 기억할까? 아니면, 이 순간들은? 처음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던 날의 하늘은, 섬의 붉게 타오르던 노을은, 우리가 같이 설거지를 하던 시간들은, 기억할까. 그것은, 어떤 의미로 끝내 풀이될 수 있을까. 서로의 기억을 나누며 즐겁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


기억은 나를 규정한다. 그러나 삶은 기억이 아닌 오늘의 연속, 길게 이어지는 하나의 선이다. 이것을 이어나가는 것은, 반복을 견디는 인내다. 그 인내 속에 의미가 피어난다. 기억의 지점들을 남길 수 있는 삶은 기쁘고 다행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나는 나의 기억들에 기대어 부모님과 살아온 연속선상의 기록들은 알지 못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 기름으로써 비로소 찾아온 깨달음. 이 깨달음을 나는 딸아이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그 날은 찾아올 것이라 나는 믿는다. 나의 연속선이 점 점 점, 그렇게 뚝 뚝 끊기며 마침내 하나의 지점으로 모아지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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