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
1.
픽사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만들고 있다. <소울>은 특별히 그렇다. 무언가를 꿈꾸고 이를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본 사람만이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조 가드너는 자기 생에 드디어 찾아온 꿈에 그리던 기회를 눈앞에 두고 어이없는 실수로 사망한다. 그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은 '재즈'를 연주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인데 어떻게 그 소명을 실현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을 수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소명이 있고 이를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는 생각은 기독교 성서에서부터 내려온 신화이자 무신론자들도 흔히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는 운명론이다. 그래서 가드너는 22호의 '불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꽃이란 소명이자 운명이다. 내 불꽃은 재즈인데 네 불꽃은 대체 뭐야. 너는 주어진 소명이 없어? 너는 삶의 목적이 없어? 이 말은 22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가혹한 자기비하로 돌아왔다.
2.
유발 하라리는 픽사의 전작 <인사이드 아웃>에 대해 '네 마음이 향하는 곳을 따르라'라는 21세기의 자유주의 신화를 구현한 영화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처럼 픽사의 영화는 당대의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소울>은 어떤 인식을 내포하고 있을까?
<소울>은 현대 사회가 운명론에서 우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먼 옛날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소명은 신분과 계급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자연스레 평생 농사일을 하며 살아가야 했다. 농가에서 자랐는데 자신이 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신분제가 타파되고 근대 사회에는 유발 하라리가 말했던 자유주의 신화가 도입되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나는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의지를 따르면 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도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서 새로운 직업을 찾을 수 있다. 여전히 운명론의 잔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나는 나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 이르러 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자유주의 신화를 비웃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없었다. 사실 우리는 물려받은 유전자와 여러 우연적 환경에 영향을 받아 의사결정을 내리고는 그것이 '나의 의지'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자유의지도 운명론도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렇다면 삶은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소울>은 이에 대해 '네 삶의 우연한 순간들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꼭 주어진 소명이 있어야 태어날 수 있는게 아니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인간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수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미용사는 그럼에도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사람들과 매일 이야기를 나누는 게 행복하다고 말한다.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혹은 별다른 꿈이 없더라도 모든 삶은 소중하다. 너의 삶이 목적 없이 우연에 끌려다니더라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소울>의 메시지는 '소확행'을 추구하고 '그저 그런' 나의 삶도 소중하다고 자신을 다독여주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비슷한 듯 새로운 이야기를 매번 훌륭하게 만들어내는 픽사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