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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우 Apr 06. 2022

나는 당신 몰래 당신의 오랜 팬입니다

줄리앙(2020)

 



나는 당신 몰래 당신의 오랜 팬입니다



오래전 당신께 보냈던 내 편지의 첫 구절을 기억하나요.

‘나는 당신 몰래 당신의 오랜 팬입니다.’


 줄리앙. 마침내 낯선 이 도시에 내가 도착했어요. 조용히 숨어있던 어느 지하에서 우리가 최초의 눈인사를 나눠보네요. 내겐 오랜 연예인이었던 당신이 “맞죠?”라며 주어도 없는 질문을 던진 순간 나는 부끄러움에 숨 쉬는 법을 잊었나봐요. 당신의 취향은 이런 것이구나. 눈길 닿는 곳마다 묻어있는 당신의 흔적을 구석구석 살펴보고서 나는 문득 가방에 든 선물이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쭈뼛쭈뼛 건넨 책 한 권에 올라가던 당신의 입꼬리를 보며 그제야 다시 숨 쉬는 법을 기억해 냈고요.


 줄리앙. 바다를 넘어서 느끼는 우리의 연대감이 분명 문학도들 사이에서 온 것일 거라던 당신의 답장이 나를 살게 했었답니다. 하루하루 외로운 전쟁을 치르던 내게 당신은 문학이란 검을 쥐어줬어요. 나는 당신이 준 무기로 낯선 불안과 싸웠어요. 사건이 피고 지는 장소에 털썩 걸터앉아 당신이 썰어둔 무수한 단어들을 봅니다. 끝내 방의 승전보를 가져 오진 못했지만 이곳에 널려있는 시와 술을 보며 ‘내 방의 전쟁만 끔찍했던 건 아니었구나, 어디서나 전쟁은 치러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줄리앙. 줄곧 당신이 살아내는 삶의 방식을 동경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당신은 내게 연예인입니다. 부디 언젠가 무기를 쥔 손으로 승전보를 전해주세요. 말초적 욕망만 남은 몸뚱아리가 되지 않기 위해 인간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작고도 큰 삶을 위한 자세를 지켜냈다고, 내가 이기지 못한 그 전쟁에서 당신만은 끝끝내 이겨냈다고, 먼 안부일지라도 당신의 승전보를 전해주세요. 이런 나지만, 오래도록 당신을 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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