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번리의 앤을 읽고
산책클럽에서 읽은 시기: (2023. 3. 29~4. 14)
3부작 앤시리즈 중 1권 [빨간머리앤]은 앤이 에이번리학교의 선생님으로 내정되면서 끝이 났다. 그러므로 2권 [에이번리의 앤]에서는 선생님으로서의 모습이 펼쳐질 것이라고 자연스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앤은 단지 선생님으로서 뿐 아니라 마을 개선협회의 멤버로 라벤더 아주머니의 사랑을 엮어주는 전령사로 새로운 등장인물들의 친구로 다양한 정체를 보여 주었다. 물론 어렸을 때 처럼 자주 상상의 숲으로 스며 들었고 곤혹스러운 실수도 했지만 책임감 있고 성숙한 모습으로. 다만 선생님으로서의 행동과 태도를 집중적으로 기대했던 나는 얼마간 아쉬움을 느꼈다. 홈스쿨 가정의 엄마 선생님으로서 ‘선생님’이란 존재의 힌트를 어디서든 모으고 싶었기 때문이리.
그렇게 책의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식어버린 감정을 갖고 마지막 소감문을 나누는 시간에 참석했다. 참가자들 모두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빨간 머리 앤]과의 비교는 피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빨간 머리 앤의 그늘에 가려지면 어떻게 하지 걱정했는데 즐겁게 읽었어요.’하는 목소리가 또렷히 전해졌고 나는 문득 침잠하던 모습을 되돌아 보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태도로 앤의 성장을 지켜보는 14살 소년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
섣부른 기대와 섣부른 실망이 섞였던 나의 감상은 어쩌면 편협된 것이 아니었을까. 각자의 상황과 시간과 소원 속에서 책은 다양하게 읽히고 해석될 수 있지만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평가는 책 입장에서도 억울할 텐데.
각자가 소감문을 발표하는 짧은 시간 동안 [에이번리의 앤]을 서둘러 복기했다. 교사로서의 기대와 신념 뿐 아니라 두려움과 실패 역시 자세하게 묘사되었음이 떠올랐다.
제인 앤드루스와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로 논쟁할 때 앤은 확고했고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녀의 이상은 고상하고 완전했으며 단지 이론이 아니라 실재 현장에서도 완벽하게 구현될 것이었다. 그러나 교실을 통제하는 것이 점점 기울어지던 어느 날 결국엔 지휘봉으로 앤서니 파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던 앤.비단 그 날 밤 뿐 아니라 언젠가 앤은 “교사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훌륭한 이론들을 갖고 있었지만 궁지에 몰릴 때마다 그 이론들을 하나씩 포기했어요.”라고 고백했다.
마릴라 아주머니의 격려가 아니었다면 맑은 아침의 새로움이 아니었다면 쉽게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홈스쿨링을 시작하면서 자주 실패감을 느꼈다. 계획했던 것을 다 끝내지 못했고 자녀들에게 칭찬하기 보다 질책하기가 쉬웠다. 언스쿨링, 자기주도학습 등 흉내내고 싶은 이름들이 많았지만 실재로는 불안했다. 일반 학교 시스템 뿐 아니라 홈스쿨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올바른 가치관과 교육관을 정립하지 못하면 경쟁과 비교라는 피하고 싶었던 늪에 고스란히 빠지게 되는 것을 느꼈다.
그때마다 앤이 경험했던 밤과 아침이 동일한 방식으로 나의 실패를 거두고 하루를 회복하게 했다. “훌훌 털어버리고 저녁이나 먹자”고 했던 마릴라의 다정한 격려 그리고 다음날 새로워진 아침의 세상이.
침대 맡에서 부끄럽고 무기력한 상태로 하루치의 실패를 토로하면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남편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위로하고 수용하고 칭찬하고 품어 주면서. 그럼 여전히 무거운 몸이었지만 뉘일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이 어제와 분리된 새로운 공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실 [에이번리의 앤]을 덮으면서 아쉽다고 느꼈던 것은 회초리 사건 이후 완벽한 반전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호되게 매를 맞았던 앤서니 파이는 억울함과 불만 대신 과거의 기억이 전혀 없는 듯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앤을 대했다.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온전히 반성했다는 뜻이리라. 한 차례의 훈육이 이렇게 성공적으로 완성될 수가. 대체로 현실에서는 훈육이 단번에 이뤄지지 않는데 앤은 앤서니 파이에게서 사랑과 존경까지 받게 되자 실제적이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앤의 성공 보다는 실수에서 교사로서의 경험을 배우고 싶었다. 잘못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훈육이 제대로 받아 들여지지 않은 경우는 어떻게 접근하는지......
1권 [빨간 머리 앤]을 읽고 어느덧 ‘앤’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해하고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일까. 나는 2권의 그녀가 나의 고민과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과도하게 기대했다. 책의 주인공인 그녀의 삶을 통제하고 주도하려는 욕심을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부렸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앤은 시시콜콜한 사례들을 정답풀이 하듯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상을 제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 숭고하고 변함없는 이상을 실재적이지 않다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은 나의 몫이리.
홈스쿨 가정에서 나는 엄마일까, 선생님일까. 아침과 저녁에는 엄마이고 낮 동안에는 선생님일까. 엄마이면서 동시에 선생님인 역할을 어떻게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해 낼 수 있을까.
승호가 어려워 하는 책을 함께 읽고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에 머리를 맞대다가 불현듯 ‘내가 왜 이렇게 하고 있지? 너무 선생님 역할에 치중된 것 같은데.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잖아.’라며 돌연 태도를 바꿨다. 본래 엄마의 모습대로 무조건 믿어주고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가는 불성실한 우리의 모습에 실망하게 되었다. 이렇듯 나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웠던 시간들. 지금은 선생님 역할에 치중되는 것 같으면 스스로를 ‘친절한’ 존재라고 인정하고 엄마 역할에 치중되는 것 같으면 무심한 것이 아니라 잠시 휴식기라고 생각한다. 어렵고 민감하게 나의 행동, 나의 태도를 평가하지 않고 융통성 있게 두어도 괜찮았다.
샬롯메이슨은 아이들이 “엄마, 그렇게 많이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화려한 그림과 세세한 교구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과도한 수업 준비가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생님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완벽하고 철저한 것 보다 지혜로운 것이 선생님의 중요한 덕목일지도.
고귀한 이상을 갖고 아이들의 온전함을 믿는 앤과 샬롯메이슨. 그들은 ‘선생님’이라는 소중한 이름을 가졌다. 나도 거창한 교육학적 웅변과 주장 보다 소중하고 변함없는 꿈들을 간직한 홈스쿨의 엄마이며 선생님이고 싶어라! (홈스쿨)교육 방법의 큰 흐름을 제시한 샬롯메이슨과 함께 에이번리의 앤 역시 ‘선생님’이라는 고귀한 이름이다.
“하지만 앤, 로웰이 한 말 알지? ‘실패 없는 낮은 목표는 범죄다’라는 말 말야. 썩 잘 해내진 못해도 이상을 갖고 거기에 맞춰 살려고 애써야지. 이상이 없다면 인생은 정말 구차한 거야. 이상을 가진 인생을 위대하고 장엄하지. 앤, 네 이상을 꼭 간직해라.” p. 183
“글쎄다, 앤. 난 네가 대학에 가는 걸 보고 싶은데. 하지만 못 가더라도 불만스러워하진 말아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결국 자신의 길을 가는 거야. 대학이란 그 길을 쉽게 가도록 도와 줄 뿐이지. 그 길은 우리가 무엇을 얻어 내느냐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넓어질 수도 좁아질 수도 있어. 인생은 어디서나 풍요롭고 충만하지. 우리가 그 풍요로움과 충만함에 온 가슴을 여는 법을 깨닫기만 한다면 말이야.” P. 184
“진정한 우정은 정말 도움이 되지. 우리는 고귀한 우정을 잊지 말고 조금이라도 진실하거나 성실치 않은 행동으로 우정을 더렵혀서는 안 돼. 우정이라는 말이 가끔 진정한 우정이 아닌 그저 친밀한 사이 정도로 타락하는 게 두려운 일이지.” p.185
“모건 부인의 작품 [황금 열쇠]에 나오는 주인공 앨리스와 루이자는 롱펠로의 시를 자신들의 좌우명으로 삼았죠.
일을 처음 배웠을 때/ 목수들은 성심껏 일했다네
순간순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신은 무엇이든 보시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두 주인공은 지하실 계단을 빡빡 문지르고 침대 밑까지 쓸어 내는 걸 잊지 않았어요. 모건 부인이 집에 왔을 때 이 창고가 지저분하면 전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p.194
모건 부인의 외모는 부인의 충실한 숭배자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듯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건 부인은 아주 유쾌하게 대화를 이끄는 사람으로, 여러 곳을 두루 여행한데다 워낙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모건 부인의 번뜩임 그 저변에는 부인의 경탄할 만한 재치만큼이나 쉽게 호감이 가는 참되고 여성스러운 동정심과 상냥한 마음씨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모건 부인은 대화를 독차지하지 않았다. p.248
펜덱스터 부인은 눈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거의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닭고기와 과일 케이크와 통조림을 어찌나 아름답고 우아하게 먹는지 마치 신들이 먹는 음식과 감로수를 맛보고 있는 듯했다. 앤이 나중에 다이애나에게 말했듯이, 펜덱스터 부인처럼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 주어도 충분했다. p.249
“프리실라가 그러는데 펙덱스터 부인 남편의 여동생은 영국 백작과 결혼했대. 그런데도 펜덱스터 부인은 자두 통조림을 두 접시나 먹었어.”
다이애나는 그 두 가지 사실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리 영국 백작이라 해도 마릴라 아주머니의 자두 통조림만은 무시할 수 없을걸.” p.250
앤은 수선화를 머리에 꽂고 샛길 입구로 가서 토요일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눈부신 6월의 햇볕을 쬐고 서 있었다. 세상은 다시 아름다워졌다. 자연의 어머니는 폭풍우라 쓸고 간 흔적을 지우느라 최선을 다했다. 설령 몇 달이 지나도록 그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해도 자연의 힘을 가히 놀라웠다. p.299
어쩌면 앤처럼 세상 사람이 건네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하늘이 내려준 상상력과 재능’을 갖고 사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앤은 이상화된 어떤 형태 또는 계시를 통해 인생을 본다. 마릴라나 네 번째 샬로타처럼 평범하게 산문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환희와 새로움을 볼 수 없어서 그것들이 마치 머나먼 천국의 빛으로 장식된 것인 양 느낄 뿐이다. p.365
사람이 사람의 어떤 점을 보고 좋아할까 하는 물음은 늘 종잡을 수 없이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그 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결국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만약 사람들의 보는 눈이 모두 똑같다면...... 그런 경우에는 인디언 속담대로 ‘모두 내 아내를 원할’ 테니까 말이다. p.367
“한두 개쯤은 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만, 2년 전처럼 그렇게 많이 타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대학에서 배우고 싶은 건 훌륭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그 지식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에요. 저는 남들은 이해하고 도와 주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p.373
어쩌면 결국 사랑은 백마를 타고 오는 기사처럼 요란하고 화려하게 한 사람의 인생에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래 된 친구처럼 알게 모르게 옆으로 살며시 다가서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은 갑작스런 빛줄기가 나타나 시와 음악이 있는 책장을 마구 넘겨 버려 평범한 산문의 옷을 입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초록 덮개를 벗고 나온 빛나는 심장을 지닌 장미 꽃처럼, 사랑은 다정한 친구 사이가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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