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 싫어하십니까?
김새섬 그믐 대표의 팟캐스트 "암과 책의 오디세이"를 듣다가, 번역서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에 관해 독서모임의 사람들이 이게 맞나, 사회적 통념 아닌가 했었는데 역자의 설명을 들어보니 실은 그 책의 부부는 (나이나 만나게 된 과정 등을 고려할 때) 그럴 만한 사이였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 어린 날,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부부싸움 중 아버지보다 3살 어린, 평소엔 존댓말을 쓰던 어머니가 "니"라고 하는 말에 크게 화를 내셨던 기억도 난다. (유년의 기억은 수십 년을 가니, 아이 앞에서 싸우지 맙시다.)
전에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핀란드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복지수당을 신청하려고 관공서에 들렀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담당자가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할 필요가 없어."
너(sinä)라니? 내가 어려 보인다고(아님) 반말인가?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한국 못지않게 연공서열 확실하던 러시아에서 교수님 등에게 꼬박꼬박 존댓말 쓰면서 대학원 다니고, 주재원일 때도 나보다 한참 어린 현지직원들에게도 존중의 의미로 말을 놓지 않던 나로서는 기분이 별로였다. 한국에서 욕을 하지 않고서도 묘하게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허락 없이 반말하기 아니겠는가? (화자가 성인인 경우에 한정)
그런데 핀란드에선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너나 할거 없이 반말을 썼다.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이나 대통령 각하 아니고서는 너나 할거 없이 반말을 쓴다. 심지어 시어머니도 내가 존댓말을 쓰니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불편해했다. 그전엔 아주버님이 시어머니를 이름으로 부르는 걸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는데, 모르는 사람이 자기에게 존댓말을 쓰면 한국에서 "어머님"이나 "할머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내가 나이 들어 보이나?' 혹은 '내가 벌써 그런 나이인가?'하고 기분이 나쁜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아이도 학교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른다. 우리처럼 "선생님(opettaja)!"이라고 부르면 오히려 선생님 이름을 모르는 건가 오해받기 딱 좋다. 직장인들도 상사를 이름으로 부른다. 물론 나도 나보다 두 살 많지만 정신연령은 스무 살쯤 어린 게 아닐까 싶은 남편을 이름으로 부른다.
'성+직함'이나 '직함'으로 사람을 부르는 게 익숙하던 사회에서 벗어나 너도 나도 '너'인 세계로 들어왔지만, 외국어로 소통할 때도 내 안의 유교 본능으로 어지간하면 '너'를 피하게 된다.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나눈 사이가 아니면 말을 놓기까지 오래 걸린다. 원체 상대방의 나이를 알아보는 데 둔감하고, 성별과 인종이 다르다 보니 어쩐지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여 그런지도 모르겠다.
"핀란드 문학작품을 한국어로 옮길 때 겪는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 또 하나는 반말(sinuttelu)과 존댓말(teittely)입니다. 한국어에서는 말을 놓는지, 높이는지가 중요한 화두입니다. 여기에는 나이는 물론 사회적 지위도 작용합니다. 알렉시스 키비의 《일곱 형제들》을 한국어로 옮긴다면 큰형에 대한 존중이 포함되어야 하겠지요. (주인공이 일곱이나 되는 이 작품은 희곡처럼 주로 대사로 이루어진 데다, 형제 중엔 두 쌍의 쌍둥이도 포함되어 있다.)" -2025.10.10. 핀란드 문학협회 주최 알렉시스 키비의 날 세미나 인터뷰 내용 중 발췌
작년에 다산어린이를 통해 출간된 《라디오 포포프》를 번역할 땐 중년 여성인 아만다 아주머니를 일찍 철이 든 아홉 살 알프레드가 어떻게 부를지 고민했었다. 1인칭으로 진행되는 이 청소년 소설에서 알프레드는 엄마, 아빠를 어머니, 아버지로 부를지, 그리고 소설 후반부에 나타난 묘령의 여자아이(나중에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라는 게 밝혀진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Unni!)를 일컫는 호칭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등. 연장자를 대하는 감수성이 내가 어린이일 때와는 또 다르겠지만, 독자들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원작을 음미할 수 있도록 글을 옮기기 위해선 심사숙고가 필요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