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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스트 정현 Apr 21. 2024

괜찮지 않다.

  괜찮으려고 한다. 괜찮았으면 한다. 괜찮고자 하는 마음이 아주 간절하다.


  괜찮은 시간의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진다. 따뜻할 수 있고, 평안할 수 있다고 느끼는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삼일이 되고, 어쩌다 일주일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상당히 평범한 일상이 나를 착각에 빠뜨리곤 한다. 항상 이랬던 것처럼.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아이들과 다를 것 없는 삶을 사는 아이가 된 것처럼. 잠시, 그렇다. 아주 잠시.


  그러나 나는 아이가 아니다. 중년이 시작된 마흔이다.


  유난히 흰머리가 많은 어른이 된 현실은 매우 갑자기, 무작정 들이닥친다. 하루종일 신이 나다가 순식간에 절벽에서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끝없이 떨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더는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기어코 마지막까지 떨어진다. 원래 내가 싹텄던 곳으로, 자라기 위해 악을 썼던 곳으로, 그리고 벗어나기 위해 내 미래와 가능성과 잠재력을 모두 맞바꿔야 했던 기나긴 마디마디의 시점으로.


  한때는 허물처럼 벗어던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아주 속 시원하게 허물을 두고 떠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다. 인생에서 십 년, 혹은 십 오 년쯤이야.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이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착각했다. 기필코 새롭게 탄생한 내가, 스무 살부터 박제된 얼굴로 사십 대와 오십 대와 육십 대를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삶을 버티는 내내 조바심을 최대한, 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남들은 모른 척 무시하고 피하던 삶을 어떻게든 들여다볼 수 있던 무지의 원동력이었다.


  삶을 너무나 우습게 생각하고 말았나보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남는 건 세월의 흔적을 정통으로 맞은 나뿐이다.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대하지 못한 자는, 그 대가를 어떻게든 치르게 되어있나 보다.

  만신창이의 마음과 곪아있는 몸, 그리고 아득하기만 한 가난. 가난. 가난.


  다행인 건, 무엇이 내 삶을 모조리 삼켜버렸을까, 에 대한 의문만큼은 내가 끝까지 져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무엇이 인간을 만들까도 생가하게 되었고, 무엇이 궁극적인 삶의 보석이 될 수 있을까도 지겹도록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이 스펙을 쌓고 커리어를 만들고 가정을 꾸리는 동안 내가 유일하게 나의 것으로 만든 작은 꾸러미가 되어준 질문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느라 인생의 다른 모든 걸 맞바꾼 것이나 다름없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후회할 수가 없다. 사실 내게는 달리 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으므로. 답을 발견하거나, 삶을 포기하거나. 내겐 둘 중 하나였다. 여전히 뚜렷한 답을 찾았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은 걸 보면, 도리어 조금씩 삶이 나아지는 걸 보면, 최악의 길을 걸어온 건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은 들어 위안을 받는다. 


  그래도 오늘 같은 밤이면, 한동안 무시하고 괜찮은 척하려던 기억들이 자꾸 떠오르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기만 해야했던 어린 내가 되어 조금도 괜찮지가 않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아마도 영원히 괜찮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이제는 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면, 그게 내가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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